[김승혜 기자]하나, 둘, 셋~.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구령을 붙이자, 누런 잔디밭에 섰던 설치미술가 김구림(80)씨가 검은 코트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냈다. 잔디밭에는 거대한 삼각형 무늬 4개가 고랑을 파 그려져있다.

삼각형 모서리에 다가앉은 김구림 화백이 성냥을 켜 불을 질렀다. 점점 검게 타들어가는 잔디위로 주황빛 붉은불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1970년 김구림 작가가 서울 뚝섬 살곶이다리 부근 언덕을 불태우며 벌였던 국내 최초의 대지미술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46년만에 재현한 것이다.

18일 이렇게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조각공원에 불이 났다. 이날 위험을 대비해 과천 소방관차도 대기했다.

이날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비롯한 미술계 인사와 일반 시민 등 100여명이 현장을 지켜봤다

잔디밭에 불을 낸 김구림화백은 약간 싱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불길이 세서 공포감까지 일었는데…."

그가 불 지른 오후 1시는 햇빛은 쨍한데 바람이 일지 않았다. 낮고 얌전하게 타들어가는 불꽃이 지나가면 검은색의 거대한 삼각형이 드러났다.

8m짜리 삼각형 총 4개, 32m 크기가 타들어간 시간은 40여분. 불꽃의 흔적은 '검은 단색화'를 남겼다.

피라미드같은 삼각형은 왜 4개를 그렸을까.

김 화백은 "우리 국민은 4자를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삼각형 4개가 반대로 역삼각형 3개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바로 삼각형 7개가 되지요?" 라며 "'죽을 사자가 럭키 세븐'으로 돌아섭니다. 이 작품은 음과양, 하늘과 땅, 자연과 예술의 섭리를 보여줍니다."라고 말했다.

 
미술관 잔디에 불이 난건 처음. 이 작품은 1970년에 한강 살곶다리 부근에서 불태운 김구림의 퍼포먼스를 재연한 것이다. 잔디를 불로 태워 삼각형의 흔적을 남긴 김구림의 대표적인 대지미술이다.

당시 한강변 경사진 둑에 지그재그 선을 그어 7개의 삼각형을 만들고 그 모양에 따라 차례로 불을 질러 까맣게 탄 삼각형 4개와 불에 타지 않은 푸른 잔디 삼각형 3개를 남긴 작업이다.

'현상에서 흔적으로- 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1970)를 재연한 김 화백은 "46년전과 달리 사람들이 많이 왔다"며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불로 태운 곳에 새순이 파랗게 자라는 자연변화 과정을 통해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생명 순환 과정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에 따라 제목도 ‘현상에서 흔적으로’라고 붙이게 되었다. 작업의 결과로 태워진 삼각형 4개와 타지 않은 삼각형 3개는 죽음과 탄생, 음과 양의 개념을 드러낸다.

태우는 행위와 과정에서 불에 검게 그을린 잔디와 그렇지 않은 곳의 선명한 차이를 ‘현상’으로 드러낸 이 작품은 야외조각 작품으로 그대로 남는다. 새싹이 돋고 자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이는 점차 흐려져 ‘흔적’을 남기거나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을 두고두고 감상할수 있다.

한편, 이번 퍼포먼스에는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며 볼거리를 제공했다. 김창일 아라리오산업 회장, 황용엽 작가등 미술관계자뿐만 아니라 일반 관람객 200여명이 잔디밭을 에워싸 서서히 타들어가는 작품을 즐겼다.

이 불지르기 퍼포먼스는 올해 과천관 건립 30돌을 맞아 미술관 쪽이 기념행사의 하나로 기획했다. 김 작가가 지난해부터 70년 대지미술의 재현작업을 준비중이란 사실을 알게 된 미술관 쪽이 판을 벌여달라고 부탁해 퍼포먼스가 성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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