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묻지마 살인' 강남역은 추모 물결
[이미영 기자]지난 3월28일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臺北)에서 벌어진 엽기적인 사건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엄마와 함께 길 가던 4세 여자아이가 돌연 목이 잘려 살해된 것. 범인은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피해자는 그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영문도 모른 채 당해야만 했다. 범행의 이유가 없고 대상이 불분명한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였다.

묻지마 범죄는 우리나라에서도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내가 혹은 내 가족이 어느날 갑자기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사회적으로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서초구의 한 주점 화장실에서 살해된 직장인 A씨(23·여) 역시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다. 상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기는커녕,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던 범인 김모(34)씨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경찰 조사결과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김(34)씨는 2008년부터 올 1월까지 4번 입원해 정신분열증 치료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11월에는 수원역 번화가인 로데오거리 인근 상가 5층에 위치한 PC방에서 이모 씨가 전혀 모르는 4명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사고로 1명이 숨지고 1명은 중상을 입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고, 두명은 부상했다. 범인 이씨는 편집성 정신분열증을 앓아 수차례 정신병원을 입·퇴원했던 정신질환자였다.

지난달 17일 광주 어등산 등산로에서 김모(48)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이모(65)씨도 마찬가지다. 쉼터에 앉아 휴대전화 통화를 하던 이씨가 '운 나쁘게' 김씨의 눈에 띄었을 뿐이다. 당시 산을 배회하며 등산객들을 흉기로 위협했던 김씨는 이씨가 자신을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오인하고 무참하게 죽였다.

택시를 기다리다 갑작스럽게 봉변 당한 케이스도 있다. B(41)씨와 C(53)씨는 3월21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한 횟집 앞에서 이 횟집 주인인 김모(37)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렸다. 장사가 잘 안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게 횟집 주인의 범행 이유였다.

이 같은 묻지마 범죄는 해마다 증가 추세다. 특히 순간의 화를 다스리지 못해 홧김에 저지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렇듯 '묻지마 범죄'는 이제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돼버렸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2012~2014년)간 발생한 묻지마 범죄는 163건에 달한다. 매년 50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데 최근 들어 그 횟수가 더 늘고 있다는 게 검찰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판단이다.

범죄 원인으로는 '현실 불만'이 24%였다. 4건중 1건 꼴이다. 정신질환(36%)과 알코올·약물 중독(35%)까지 합하면 그 비율은 95%에 달한다.

경찰청의 '한국의 이상범죄 유형 및 특성' 보고서는 분노 조절 실패 범행 피해자의 15%가 피의자와 면식관계(얼굴을 서로 알 정도의 관계)가 아닌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범행 장소도 전체의 61.5%가 길거리나 공공장소였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추정할 수 없는데다 일반적인 범죄 예방 정책으로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게 묻지마 범죄가 심각한 이유"라며 "이런 범죄 유형은 계속 늘어날 수 밖에 없는데, 부의 불균형과 경쟁 심화로 인한 정신적 압박이나 고통을 해소하기 어려워진 현실 등이 범죄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범행 수법이 날로 흉포·상습화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지난해 서초구 내곡동의 훈련장에서 동료 예비군 3명에게 총을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예비군 최모(24)씨나 이른바 '트렁크 시신' 살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일곤(49)씨가 대표적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와 스트레스에 취약한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는 사회 시스템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곽금주 서울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경제 발전과 동시에 발생하는 실패와 불평등이란 부작용이 촉발시키는 '선진국형 범죄'지만,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구와 달리 한국은 집단에 소속돼 서로 비교하는 문화가 있어 더 극심한 것 같다"면서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의 스트레스를 제대로 다뤄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신질환이나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상실 범죄자를 감형할 게 아니라 치료를 거부하거나 단순히 술을 마시고 감정이 격해져 죄를 지었다면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곽 교수는 "정신질환이 분명하다면 처벌보다는 치료가 우선돼야 하며 정부는 치료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 제재 수위가 높아져야 사회가 보다 안전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박성철 백석대 법정경찰학부 교수는 "심신미약·상실은 타당한 경우에 한해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 국가가 공정성을 잃은 행위를 보일 때 사람들은 더 절망해 불신이 커지게 된다"면서 "사회적 위험성을 고려해 가중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 구조가 점점 복잡해 지고 있다. '묻지마 범죄' 역시 그런 구조 속에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분노'하는 사람들이 자포자기 심정에서 저지르는 범행이라는 점에서 사회안전망을 더욱 촘촘히 짜야 한다. 근본대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정신질환 범죄자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 그래서 체계적인 보호·치료시스템을 갖춰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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