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숙 기자]서민들에게는 한 없이 높은 은행 문턱, 그러나 거액 사기꾼들에게는 쉽게 뚫린다. 최근 은행들이 거액의 대출 사기를 당하는 사례가 잇따라 발생함에 따라 금융당국이 원인 파악을 위한 점검에 착수했다.

금융감독원 고위 관계자는 22일 "은행권의 대출 프로세스가 어떤지 살펴보고 있다"며 "사기를 당한 주요 은행을 중심으로 6월말까지 점검해 허술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필요하면 대책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금감원이 은행권의 대출 심사 과정을 직접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 모뉴엘과 디지텍시스템즈 사태를 계기로 은행권이 내부통제를 강화했지만 여전히 대출 사기 사건이 발생하자 칼을 빼든 것으로 풀이된다. 또 대출 사기와 관련 무역보험공사와 일반 은행이 서로를 탓하며 소송을 벌이는 등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점도 작용했다.

모뉴엘 사태는 중견 가전업체인 모뉴엘이 자금난에 직면하자 수출서류를 조작해 무역보험에 가입한 후 금융권에 총 6672억원의 손실을 끼친 무역보험 사기 사건이다.

박홍석 대표 등은 2009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미국, 홍콩 등 해외 지사에서 수출대금 액수를 부풀리거나 허위 매출을 올리는 수법으로 1조2000억원대의 해외매출을 조작했다.

금융권도 이러한 허위·위장 수출에 속아 총 6700억여원을 빌려줬다. 당시 최수현 금감원장은 "모뉴엘 사태는 무역보험공사의 보증을 믿고 금융사들이 여신 심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점, 모뉴엘의 수출거래방식 특성상 물품이 제대로 갔는지, 관련 서류가 위장되지 않았는지 검증하기 힘든 것 등이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디지텍시스템스 사태는 대규모 대출 비리 사건이다. 780억원대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브로커가 개입했는데 금감원과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농협은행, 국민은행, 씨티은행, 무역보험공사 등이 연루됐다.

해당 업체는 경영진들의 무분별한 횡령 등으로 지난해 1월 상장폐지됐고 1160억원의 대출금 중 총 885억원 상당이 미상환된 상태로 금융권의 대규모 부실을 초래했다.

최근에는 모뉴엘이 사용했던 사기 수법·구조와 판박이 형태로 범행을 저지른 전자제품 금형 오퍼·수출업체 후론티어 대표가 기소되기도 했다.

은행들은 대출 사기가 개인의 일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기관은 기업들과의 접촉이 잦아 비슷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은행들이 대출 심사에 대해 저마다의 기준과 절차를 규정하고는 있지만 현장에서 엄격히 적용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 금융권에서도 나온다.

디지텍과 모뉴엘의 대출을 모두 거부한 은행 관계자는 "재무제표의 숫자만 보면 모뉴엘, 디지텍 모두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평판 등 비재무적평가를 고려하고 현장 실사를 했더니 대출을 해 줘서는 안 되는 회사라는 결론이 났다"며 "은행들이 내부통제와 징계조치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고 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권이 대출할 때 허위 여부와 입증 책임을 어떻게 점검하고 구분하는지 등을 중점 점검할 것"이라며 "전반적으로 분석해 취약한 부분은 없는지 살피겠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