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숙 기지]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지난 8일 홍기택 부총재가 맡고 있던 최고리스크책임자(CRO)에 대한 공개 채용 절차에 착수했다.

휴직을 신청하고 잠적 중인 홍 부총재가 더 이상 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달 28일 휴직 이후 열흘 만에 내린 신속한 조치다. 홍 부총재는 지난 2월 임명된 지 반 년도 안 돼 국제금융기구 부총재 자리에서 물러나는, 전례 없는 당사자로 기록에 남게 됐다. 게다가 AIIB는 홍 부총재가 맡고 있던 CRO 자리를 국장급으로 격하시키고, 대신 재무책임자(CFO) 자리를 부총재로 격상했다.

이에 따라 CFO로 내정돼 있던 프랑스 출신 티에리 드 롱게마르가 새로 부총재가 되고, 홍 부총재는 사퇴 수순을 밟게 됐다. 우리나라가 차지한 5명의 부총재 중 한 자리를 프랑스에 넘겨주게 된 것이다.

결국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의 돌출 행동으로 AIIB 출범 4개월 만에 우리나라가 부총재직을 잃게 되면서 국제사회에서 망신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4조3000억원대의 분담금을 내기로 약속하고 얻어낸 부총재직을 허망하게 잃어 국익에도 손실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1차적인 책임은 홍 부총재에게 있음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한국이라는 국가를 대표해 국제금융기구 부총재 자리를 맡은 사람이 본분을 망각하고 “대우조선해양 지원 당시 서별관회의에서 정부로부터 린치를 당했다”는 식의 발언을 수 차례 쏟아내며 국가적 망신을 초래했다.

하지만 정부의 책임은 이보다 훨씬 더 무겁다.

사태가 커지면서 금융이나 개발투자 실무 경험이 거의 없는 홍 부총재를 누가 AIIB 부총재로 밀어줬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기구 회의에서는 부총재가 유창한 영어로 현안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자격도 안 되는 이를 막중한 자리에 ‘낙하산’으로 내리 꽂은 것부터 단추를 잘못 뀄고, 국제금융기구 부총재로서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사후 관리를 하지도 않았으며, 휴직 신청 이후에도 이를 만회하려는 외교적 노력도 낙제점이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정부 관계자는 "자본금만 1000억달러에 달하는 AIIB의 도로·항만 등 각종 개발 사업을 관리하는 역할을 홍 부총재가 관련 경험 없이 해낼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애초부터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정부 안팎에서는 30년 가까이 평범한 교수로 지내던 홍 부총재가 현 정부 출범 후 산업은행 회장에 이어 AIIB 부총재로까지 승승장구한 것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말이 나온다.

관가와 금융계에서는 "중국이 주도한 신생 기구라는 점에서 쉽게 생각하고 '낙하산'을 보냈다가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 있다. 국제기구에서 근무했던 고위 관료는 "국제기구 부총재가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나 받고 거드름 피우는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며 "직위가 올라갈수록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현안이 많다는 게 국제기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홍기택 부총재를 제외한 4명의 AIIB 부총재는 오랜 기간 실전에서 기본기를 다진 인물들이다. 정책·전략 담당 부총재인 독일 출신 요하킴 폰 암스베르크는 세계은행(WB)에서만 25년을 근무하고 세계은행 부총재까지 지낸 개발금융 전문가다. 회원국·이사회 담당인 대니 알렉산더 부총재는 금융에서 선두를 달리는 나라인 영국에서 재무부 차관을 5년이나 지냈다.

앞서 정부는 또 다른 국제기구인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 자리에 ADB측에서 원했던 인사를 배제한 채 엉뚱한 인사를 추천해 12년 만의 부총재 자리를 놓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인 전례가 있다. 당시 정부 내에선 “다 된 밥을 놓쳤다”는 한탄이 일었는데, 이번에는 “먹던 밥까지 뺏겼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분명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엄중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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