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1953년 미 2사단 사단장 제임스 밴 브리트 장군, 백선엽 참모 총장, 8군 사령관 맥스윌 테일러 장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
[심일보 기자]1950년 6월26일은 미국시각으로 일요일이었다. UN은 그 전날 북한의 전면남침을 불법침략으로 규정하고 즉각 북위 38°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과 제3국들의 대북한 지원 자제를 요구하는 제1차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 다음날에는 미국의 해·공군이 참전했고 28일에는 UN의 “한국에 군사원조 제공”을 내용으로 하는 제2차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날 영국군이 참전했고 7월1일에는 미국 지상군과 오스트레일리아 해·공군도 참전했다.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진, 한달 만에 한반도 서남해안의 순천을 점령했다. 이에 국군은 대구 북방 낙동강에서 미군과 함께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전국토 점령을 코앞에 둔 북한군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각오로 싸우는 우리 국군 사이 처절한 혈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지상작전을 총지휘한 제임스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 밴프리트 2세 공군중위도 전투기 조종사로 출격하여 실종되었고, UN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육군대위도 세 번이나 부상당하여 제대한 후 사망했다.

이 글은 전 TBC-TV PD 였던 이정웅씨가 쓴 글이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아버님께 힘을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 편지는 워커 장군의 후임이었던 릿지웨이 장군이 맥아더 장군이 해임됨에 따라 UN군 총사령관으로 영전한 뒤 그 후임으로 부임한 밴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지미 밴프리트 2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해외근무를 마쳤음으로 한국전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해서 아버지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국전에 참여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리고 그 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2일. 이 훌륭한 군인은 압록강 남쪽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새벽 세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한 후 표적을 향해서 날아가더니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 이다. 4월 4일 아침 10시 30분. 8군 사령관 밴프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가 폭격 비행 중 실종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지미 밴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고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무모하다.”라고 아버지가 아들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 부대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증언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그는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밴프리트 미 8군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이런 강직하기 짝이 없는 군인 앞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하였다.

1952년 12월,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만디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사령부를 찾은 것이었다.

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군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전 세계의 기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끝내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느닷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가 전투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대통령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하지 않은 밴프리트였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라고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가 놀라자빠질 사적인 부탁을 공공연히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서로 두리번거리면서 웅성거리고 밴프리트 사령관도 언짢은 표정으로 아이젠하워를 응시하면서 의아해 하자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단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즉시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장면인가!

순식간에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 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고 곧이어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라는 밴프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 2사단 72탱크 대대의 대대장 T.R. Fehrenbach 중령이 전역 후 쓴 'This kind of war(한국 전쟁)' 이라는 책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페렌바하는 전역 후 유명한 역사 저술가와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마지막 UN군 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클라크 대위도 금화지구의 저격능선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으로 전역을 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 중 35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는 모두 54,000여명, 부상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령관이 전사하고 사단장이 포로가 되며 자기 자식들마저 참전시켜 전사를 당하게 하는 장군들과, 남의 나라 전쟁에 54,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도 꿈쩍않는 국민을 둔 미국, 끔찍히도 자식들을 사랑하여 거대한 재산을 물려주려고 온갖 부정을 일삼던 전직 대통령들과, 어떻게든 자식들을 군대에 안 보내려고 갖은 수를 다 쓰는 벼슬께나 하고 돈께나 있다는 고위층 사람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역을 면제받으려고 온갖 꾀를 다 쓰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인기를 누리고, 두 명의 소녀가 작전 훈련 중에 사고로 죽었다고 미국 물러가라며 몇 달 동안 촛불시위로 온 나라를 소란케 하는 국민을 가진 한국,

어느 나라 아버지가 훌륭한 아버지이고 어느 국민이 더 훌륭한 국민인가?

어느 나라 국민이 더 애국하는 국민인가?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미워하고 반대해야 하며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은혜란 무엇이고 신의와 도리가 무엇이며 애국이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입은 은혜를 갚고 신의와 도리를 지키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애국하고 있는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동포여!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쫒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

이 6. 25의 노래 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대통령이나 장관들은 부를 수 있을까?

60만 우리 국군은 부를 줄 아는가?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못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모도 선생님도 군대도 대통령도 다 잊어버렸는데 누가 가르쳤겠는가? 그러니 지금 우리 젊은 것들이 헷갈려 은인과 원수를 분간 못하는 것이다.

이래서 한국 전쟁을 잊어버린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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