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일명 김영란법 시행을 하루 앞두고 곳곳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27일 점심 서울 주요 호텔과 일부 고급 식당은 평소보다 많은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김영란법 시행을 하루 앞둔 시점에 마지막 점심을 먹기 위해 고급 식당을 찾는 손님이 늘었기 때문이다.

롯데호텔서울과 더 플라자 호텔 등에도 뷔페를 제외한 레스토랑 좌석이 최근 보름간 90% 이상 꽉 찼다고 전했다.

정부부처의 공보실이나 대변인실도 이날만은 출입 기자단과 식사를 하며 김영란법이 몰고 올 사회적인 파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 정부부처의 공직자는 "김영란법 전에 마지막 식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출입기자와 점심·저녁 약속을 잡았다"고 밝혔다. 공무원들도 마지막 식사에 들어갔다. 아예 법 시행 이후로는 외부인사들과 약속을 잡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27일 세종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주변 식당가에서 공무원들이 식사를 위해 평소보다 적은 사람이 식당가를 찾았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 하루 앞두고 시범 케이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츠리는 분위기가 역역했다.

이렇듯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됨에 따라 한국 사회에 가히 혁명을 몰고 올 전망이다.

국민 권익위원회가 지난 2012년 8월16일 처음 김영란법을 발표한 지 4년1개월만에 빛을 발하는 김영란법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정·부패 관행을 끊기 위한 '제2혁명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영란법의 적용기관은 총 4만919곳으로, 행정·공공기관 이외에도 학교와 학교법인 2만2412곳, 언론사 1만7210곳이다. 적용대상은 공무원·공직유관단체 임직원 160만명과, 사립학교 교직원 70만명, 언론사 임직원 20만명 등 총 250만명이다. 또 직접 적용대상의 배우자까지 포함하면 전체 적용대상은 총 4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내일부터(28일) 공직자 등 김영란법 대상자가 동일인으로부터 1회 100만원, 회계연도 300만원을 넘는 선물을 받는 경우, 직무관련성을 불문하고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100만원 이하의 금품인 경우에는 직무관련성이 없으면 처벌대상은 아니지만, 직무와 관련이 있다면 과태료(2~5배)부과 대상이다.

단 '사회상규'상 미혼인 공직자가 연인으로부터 받는 선물은 법적 처벌대상이 아니다.

국내기업 '기울어진 운동장' 우려

이러한 가운데 글로벌 마케팅 경쟁에서 우리 기업들이 역차별을 받는 '기울어진 운동장'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김영란법이 마케팅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은 물론 심리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글로벌 무대에서 외국 기업들에 비해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국내 기업들은 김영란법의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모호하면서 과도한 제약에 발목이 잡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전자업체들은 내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행사인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2017'을 앞두고 김영란법 '변수'로 고심하고 있다.

글로벌 IT·전자·자동차 업체들의 '마케팅 전쟁'이 벌어지는 현장이지만, 국내 업체들은 맞춤형 전략은커녕 실무준비에도 애를 먹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처럼 국내 주요 언론을 초청해 차별화된 기술을 알리고 싶지만, 김영란법 시행으로 고민이 많다"면서 "차별 없이 초청하면 가능하다는 얘기도 있고, 김영란법 위반이라는 얘기도 있고 해석도 제각각이어서 더욱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신제품을 출시한 뒤 국내외 행사를 마련할 때도 김영란법 저촉 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김영란법은 '속지주의'와 '속인주의'가 모두 적용돼 국내에서의 위반행위는 물론 국외에서 내국인이 위반행위를 해도 관련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국내 전자업체가 김영란법 시행을 맞아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사이 애플과 같은 글로벌 경쟁 기업들은 마케팅에 힘을 쏟고 있다. 애플은 자국 언론으로부터 "혁신 없이 마케팅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축적한 실탄을 마케팅에 쏟아붓고 있다.

애플은 서울 강남역 삼성전자 본사 주변에 직영매장인 '애플스토어'를 개설하고자 부지를 물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애플이 한국에서 첫 번째 매장을 열기 위해 삼성전자 본사 '뒷마당'을 부지로 물색했다"고 보도했다.

주요 완성차 업체들도 28일 김영란법 시행 이전에 각종 시승 행사를 연달아 개최한 뒤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차는 연말 신형 그랜저 출시를 준비하고 있지만, 예전과 같은 형식의 마케팅 행사를 하기 어려워졌다.

통상적으로 제공하던 차량 시승 기회와 식사, 기념품 등이 김영란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조심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외국의 주요 모터쇼에 언론과 전문가를 초청해 기술의 우수성을 알리던 기존 관행도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도요타 등 외국 경쟁 업체들은 오피니언 리더들을 자유롭게 초청해 차량의 우수성을 알리는 동안 국내 업체들은 김영란법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김영란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면 허용 행위를 둘러싼 '모호성'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얘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병원들 "민원 차단" 급급

의료기관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던 일정조정, 입원실 부탁 등이 전면 금지된다.

이에 따라 국공립병원과 대학병원들은 이러한 청탁을 금지한다는 가이드라인과 내부방침을 세웠다.

또 시행 초기 적용 대상과 범위 대한 정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병원들은 지인이나 환자들의 민원을 원칙적으로 차단키로 했다. 법이 시행되면 정확히 어떤 행동이 저촉될 수 있는지 잘 모르니 일단 조심하고 보자는 분위기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전직원과 교수들을 대상으로 김영란법 교육을 하고 관련 책자를 배포하고 있다"면서 "직원들은 김영란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만 환자들은 김영란법을 모르고 진료나 병실을 부탁할 수 있어 서로 조심하기 위해 안내문을 병원에 붙여놨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가이드라인대로 환자민원은 일절 안받기로 원칙을 세웠다"면서 "다양한 사례가 쌓여봐야 방향이 잡힐 것 같다. 시행 초기이다 보니까 원칙적으로 안되는 것은 안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역 민간병원들은 자체적으로 내부 규정을 만들어 부정청탁 등을 받았을 때 법적으로 처벌받진 않더라도 회사 내에서 징계는 내리도록 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권익위는 최근 환자가 정말 위독한 경우에는 부정청탁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위독함 등을 가장해 진료·치료 순서의 변경을 요청하는 건 위반이라고 명시했다.

권익위는 "환자가 위독한 경우 등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의학적 판단에 따라 접수 순서대로 하지 않더라도 사회 통념상 용인될 수 있으므로 부정청탁이 아니다"고 밝혔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환자나 보호자가 의료진에게 수술, 진료 등에 대한 감사 인사로 선물을 건네는 일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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