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민생 대통령이 돼서 국민행복시대를 열겠습니다.”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1577만3128표(51.6%)라는 역대 최대이자 1987년 직선제 이후 첫 과반수 득표를 얻어 당선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부녀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리고 4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 속에 19년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그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첫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자리했던 ‘박정희·박근혜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5·16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회의 의장에 오른다. 당시 9세이던 박 전 대통령은 이후 18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서 살았다.

프랑스 이제르 주 그르노블로 유학을 떠난 지 반년가량 지난 1974년 8월 15일. 친구들과 여행 중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하숙집에서 “어머니께 무슨 일이 생겼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급히 귀국길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은 드골 공항에서 고 육영수 여사 사진과 함께 ‘암살’이라는 글자가 실린 신문을 발견했다. 그는 이 순간을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라고 회고했다.

22세였던 박 전 대통령은 육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 아버지를 보좌했다. 매일 아침식사 때마다 함께 신문을 읽고 국정 전반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국정에 대한 식견을 키웠다고 한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지 18년 만인 1979년 10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탄에 숨진 데 이어 박 전 대통령도 파면되며 2대에 걸쳐 비운을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집권 4년 내내 일방통행식 국정운영과 불통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 결과 권력남용과 헌정유린의 주범이 됐다. 그의 40년 지기이자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는 공범이었다.

 
정치입문에서 대통령 당선까지

박 전 대통령은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최순실씨와 전 남편 정윤회씨 등 최태민 일가가 박 대통령의 선거를 도왔다. 최씨 부부는‘문고리 3인방’(이재만·안봉근·정호성)을 박 전 대통령 보좌진으로 발탁했다. 이때부터 국정농단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 후광 덕분에 박 전 대통령은 보수 진영의 후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고향인 TK(대구·경북)를 정치적 자산으로 물려받은 데다 박정희 향수를 간직한 산업화 세력이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고 당시 이회창 총재의 당 운영방식을 독선적이라고 비판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에서 패했고 차떼기 불법 정치자금 사건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를 맞았다. 2004년 당 대표가 된 그는 천막당사로 옮기고 당을 쇄신하며 총선을 진두지휘했다. 참패가 예상됐던 한나라당은 299석 중 121석을 확보했고 좌초 위기에 놓인 당을 구하며 ‘보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2006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당 대표로 지원유세에 나섰다가 면도칼 테러를 당하는 사건을 겪으면서도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퇴원 후 최순실씨의 언니 최순득씨 집에서 간호를 받았다. 2년3개월 대표를 지내면서 각종 선거에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에 ‘40대0’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고 대선후보 반열에 올랐다.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여론조사에 밀려 패배했다. 당시 후보 검증과정에서 최태민 일가 관련해 제기된 의혹을 부인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후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선 친박계가 학살을 당했고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2010년 6월엔 이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 통과를 통해 원안을 고수한 그를 고립시키려 하자 국회 본회의 반대 토론까지 벌이면서 부결시키는 뚝심을 보였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김종인 전 의원 등 중도 성향 인물을 영입해 2012년 4월 총선에서 152석을 얻으며 대승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 등을 통해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장한 그는 12월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불통·독선·무능으로 국정농단 촉발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부터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가 잇따라 낙마하는 ‘인사 참사’를 치렀다. 국민에게 약속했던 경제 민주화, 복지 정책도 파기하거나 후퇴했다. 4년 동안 반복된 인사 실패는 국무총리, 장관 후보자 8명이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하는 오점을 남겼다. 또한 문화계 인사 블랙리스트 작성을 강행하는 등 국정목표인 국민대통합마저 내팽개쳤다.

그는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때 “세월호로 경제가 다 죽는다”며 유족들을 고립시켰고 통합진보당 해산 등을 통해 종복몰이를 시도해 국론을 분열시켰다.

그는 청와대 주요 참모와 국무위원들의 대면보고를 받지 않았다. 스스로 ‘불통’을 자초한 것이다. 집권 후반기엔 한·일 위안부 협정,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등을 일방적으로 추진해 보수와 진보 진영의 이념 대결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무능은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탄핵을 유발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박 전 대통령은 7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한 채 별다른 지시도 안 했다.

그는 자신의 치부에 대해 반성은커녕 사실을 호도하기에 급급했다. 2014년 세계일보가 ‘정윤회 비선실세 동향’ 문건을 보도하자 이를 ‘찌라시’로 규정하며 사실을 외면한 채 문건 유출만을 문제 삼아 검찰 조사를 유도했다.

박 전 대통령의 은폐에도 국정농단의 진실은 드러났다. 한겨레가 지난해 9월 최순실씨의 미르·케이(K)스포츠재단 설립 및 모금 개입 의혹을 보도하면서 최씨의 국정농단이 만천하에 공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세 차례에 걸친 대국민 담화를 했으나 검찰과 특검 조사 약속까지 어겼다. 분노한 국민들은 촛불집회에서 박 전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했고, 민심에 떠밀린 국회는 지난해 12월9일 박 전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결국 3월10일 오전 11시 21분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박 전 대통령은 “권력은 칼이다. 권력이 클수록 그 칼은 더욱 예리하다…정작 큰 권세를 가장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그것을 소유한 당사자이다”(1990년 9월 2일 일기)라고 적었다. 그만큼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채 최순실 씨가 권력을 차용해 사익을 챙길 공간을 만들어줬다. 그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은 20년의 정치 인생을 불명예스럽게 마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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