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통영문화재단>
[김승혜 기자]“윤이상은 남한과 북한, 동양과 서양의 두 세계에 몸담아온 특이한 존재였다.” 작곡가 윤이상(1917~1995) 평전을 낸 박선욱씨의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5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고(故) 윤이상(1917~1995)의 묘소를 가장 먼저 찾아 참배하면서 음악가 윤이상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그는 ‘원조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세계적인 작곡가로 손꼽히지만 과거 북한 방문과 관련된 논란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왔다. 김 여사의 이번 방문으로 음악가 윤이상이 재평가 받게 될지 음악계는 주목하고 있다.
 
윤이상 선생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은 음악가다. 1917년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어난 윤이상 선생은 3세에 경남 통영으로 옮겨 어린시절을 보냈다. 통영은 단순히 그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 아니라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된 장소다.

14세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작곡과 음악이론, 첼로 등을 배우고 잠시 귀국한 후, 다시 1939에 일본에 건너가 음악에 매진했다.

그는 1956년 부인과 어린 남매를 고국에 두고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곧 독일로 옮겨 1959년 베를린 음대를 졸업했다. 그는 다룸슈타이트음악제에서 쇤베르크의 12음기법으로 한국의 궁중음악 색채를 표현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해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순탄한 길을 걸었던 윤이상 선생은 1967년 ‘동백림 사건(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돼 2년간 고국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험한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에서 한인회를 조직해 박정희정권의 독재정치를 비판했던 윤이상 선생은 ‘친북활동’ 혐의로 베를린에서 강제송환 돼 무기형을 선고 받고 옥살이를 하다 세계 음악계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2년만에 석방돼 한국을 떠났다.

윤이상 선생은 석방 후 독일에 영주하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갔다. 윤이상 선생의 신념은 ‘이념’보다는 ‘민족’을 중시해 지난 1990년 10월 평양에서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음악인이 함께한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통일을 위한 음악 등 예술분야의 교류를 강조했다.

이후 윤이상은 당시 서독의 베를린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며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 1987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대공로 훈장을 수여받았다.
 
유럽음악계에서는 윤이상을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로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이상은 1958년부터 1994년까지 기악곡 101곡, 성악곡 17곡 등 총 118곡을 지었다. 윤이상은 교도소에 있던 때 쓴 세 곡을 빼고 모든 작품을 유럽에서 창작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인 1994년 9월 서울에서 열리는 자신의 음악제에 참석할 예정이던 윤이상 선생은 조건 등이 맞지 않아 좌절되자 몸져누웠다. 윤 선생은 1995년 1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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