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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배 기자]소문으로만 돌던 5·18 당시 ‘광주 공습설’의 실체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전두환 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명분으로 '한국이 베트남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세운 사실이 미국의 첩보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계엄 확대 나흘 전 주한미군사령관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직접 만나 '북한의 공격 징후는 없다'고 말했지만, 비상계엄 확대는 강행됐다.

이는 5.18 당시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은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한국군 수뇌부의 베트남 참전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미 국방정보국(DIA)의 비밀 문서(어제 기사 링크) 내용을 뒷받침 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22일 CBS노컷뉴스가 입수한 미 DIA 첩보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국방부는 1980년 5월 26일 각국 대사관 무관들에게 '광주사태 설명자료'라는 문건을 돌렸다.

DIA는 이 자료를 토대로 다음날인 27일 '사회불안 상황에 대한 (한국) 국방부의 개황 설명'이라는 제목의 첩보보고를 생산해 본국의 국무부와 CIA 등으로 발송했다.

문서에 따르면, 1980년 5월 17일 주요 군 지휘관 회의에서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결정이 내려졌는데, 계엄 확대 결정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가가 베트남과 같은 운명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 국방부는 "불순한 배후조종세력에 의해 주도면밀한 책동이 계획되고 있음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방치될 경우 회복 불가능하게 되어 국가가 베트남과 같은 운명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에 정부의 강력 대응을 촉구하는 의견이 증가하고 있다"고 미국에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 회의의 참석자들은 국가를 베트남과 같은 운명에서 구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실시되었던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의하였다"고 전하 있다.

◇ 위컴 "북한 공격 임박징후 없었다… 전두환 청와대 입성 포석일 뿐"

그러나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1989년 6월 19일 미국 부시 행정부가 발간한 ‘광주 백서’에 따르면, 위컴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계엄령 확대 전인 1980년 5월 13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학생 시위의 뒤에 북한이 숨어 있으며, 남한 공격을 위한 결정적 순간이 올 것"이라고 위컴에게 말했다.

그러나 위컴 전 사령관은 '미국은 언제든 한국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고, 북한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징후는 없다'고 반박했다.

위컴 전 사령관은 전두환을 만나고 온 뒤, '전두환이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청와대 입성을 위한 포석에 불과할 뿐'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실제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계기로 전두환은 당시 최규하 정권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쥐게 된다. 전두환 집권계획의 일환일 뿐인 비상계엄 확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베트남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끌어들인 셈이다.

같은 날 미 국부무부는 워싱턴에서 대변인 명의로 "북한의 특이한 동향이나 남한 공격이 임박했다는 어떤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고 성명까지 냈다. 그러나 이는 통제를 받고 있던 한국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계엄군은 한국이 베트남처럼 되기 전에 배후불순세력에 의한 소요사태를 진압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이는 다시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빌미가 됐다.

 
◇ 베트남 전 상징 헬기도 진압에 동원

이런 맥락에서 5.18 당시 광주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사격도 주목된다.

광주 전일빌딩 10층에 남아있는 수십 발의 총탄 흔적에 대해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정지비행 중인 헬기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발사된 M60 기관총의 탄흔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난 5월, 광주시 5.18 진실규명지원단은 국과수의 감식결과를 토대로 군 관련 작전문서 등을 분석한 결과, 1980년 당시 M60 기관총이 장착이 가능한 헬기는 UH-1H 수송 헬리콥터 뿐이었다고 밝혔다.

UH-1H 이로코이즈, 또는 '휴이(Huey)'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헬기는 수송용이지만 M60 기관총을 도어건으로 장착해 옆문을 열고 측면 사격이 가능하다.

바로 미군이 베트남 전 당시 대거 투입해 사용한, 베트남 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 기종이다.

지원단은 휴이 헬기가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부터 5시 30분 사이에 공수여단이 전일빌딩과 광주 YWCA 진압작전에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이를 지원 엄호하기 위해 동원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전두환 등 군 수뇌부가 베트남에서 실전경험을 쌓았고, 베트남을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점, 그리고 베트남 전의 상징과도 같은 헬기가 광주에서도 실전 투입돼 사격을 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21일 JTBC 보도에 따르면 5·18 직후에 신군부가 전투기를 동원해서 광주를 공습하려 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JTBC가 인터뷰한 당시 조종사들은 “5·18 직후에 출격 대기명령이 내려졌고, 전투기에 공대지 폭탄을 장착한 채 출격을 준비했다”고 증언했다.

1980년 수원 제10전투비행단 101대대에서 F-5E/F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한 김모씨는, 5·18 사나흘 뒤인 5월 21일에서 22일 사이 비행단 전체에 출격 대기 명령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10년 넘게 전투 조종사로 근무하면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공대지 실무장을 최대한 장착하고 대기했기 때문에,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강조했다.

김씨와 같은 대대에 근무했던 또다른 조종사 김모씨도 광주 공격을 준비했었다고 말했다.

 
DIA 첩보보고서 중 한국 국방부의 계엄령 확대 배경 설명 부분

(DIA 보고서는 한국 국방부의 설명이 일부 왜곡돼 있다고 주석을 달아놓았음) 사태의 개요

1. 계엄령 시행의 배경

A. 학생 시위가 군중봉기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고, 일부 종교인사들이 노동운동과 학원가로 침투, 사회주의 선전을 통한 노사갈등 조장으로 노동자의 연대파업을 조직하려는 책동이 있었음. 1980년 5월 1?(식별불가)과 15일 사이 기간 중 학생들의 소요가 극심해짐에 따라 불순한 배후조종세력에 의해 주도면밀한 책동이 계획되고 있음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방치될 경우 회복 불가능하게 되어 국가가 베트남과 같은 운명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에 정부의 강력 대응을 촉구하는 의견이 증가하고 있음.

B. 계엄당국은 경찰력만으로는 학생 소요사태를 저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음. 따라서 1980년 5월 17일, 주요 군 지휘관 회의가 개최되어 계엄군이 행동할 때가 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음. 이는, 만약 현 상황이 방치된다면 고등학생, 노동자는 물론 깡패와 폭력조직까지 시위에 가담하게 되고 더 이상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정부 전복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임. 따라서 동 회의의 참석자들은 국가를 베트남과 같은 운명에서 구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실시되었던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의하였음. 동 회의는 이어 국무회의에 계엄령 확대를 권고하였고 5월 17일 24:00부 전국에 대한 계엄령 확대를 승인받았음.

美 광주백서 중: 전두환-위컴 면담 관련 내용

26. 위컴 장군은 5월 13일 전두환을 만났음. 전두환은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이전에 했던 말과는 반대로, 학생 시위의 뒤에 북한이 숨어 있으며 남한 공격을 위한 결정적인 순간이 곧 올 것이라고 얘기했음. 위컴 장군은 미국은 언제든지 한국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변하고, 하지만 북한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징후는 없다고 얘기하였음. 위컴 장군은 정치 자유화를 향한 움직임이 한국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며 한국의 안정이야말로 북한을 억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미국의 입장을 강조하였음.

위컴 장군은 국내 상황에 대한 전두환의 부정적인 분석과 북한 위협을 강조하는 것이 청와대 입성을 위한 포석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고하였음.

27. 5월 13일, 워싱턴은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의 보고 및 서울에 돌고 있는 북한의 활동 관련 소문에 대응하였음. 국무부 언론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음:

"우리는 북한군의 특이 동향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남한에 대한 모종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간주할 수 있는 어떠한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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