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 문신. 일본의 침략전쟁이 극에 달한 시기 20세 젊은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1990년대 초 PC통신 〈하이텔〉에서 온라인 글쓰기를 시작해 ‘산하’라는 닉네임으로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역사이야기꾼 김형민(SBS CNBC PD).

필자는 이봉창, 이육사, 유관순 등 익히 알려진 독립운동가부터 총독부를 날리려 했던 김익상, 폭정을 거부한 기독교인 주기철, 기생의 몸으로 ‘독립만세’를 외친 김향화 등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 독립운동가까지 여러 독립운동가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칼럼리스트 이기도 하다.

그가 한 선배에게 보낸 감동의 글을 시사플러스에서 공유했다.

ㅡ 이 땅의 아들과 딸에게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뭐랄까 참 무뚝뚝한 내용의 연속이야.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절제된 무인(武人)의 글이지만 보통 일기에 털어놓게 마련인 감정의 토로나 내면의 고백 같은 건 그다지 보이지 않아. 하지만 이순신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격렬하게 폭발하여 일기장을 덮을 때도 있었지. 고향을 습격한 왜군에게 아들 면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였지.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그릇된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무르게 하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허구헌날 날씨가 어떻고 활 몇 발을 쏘았고 누가 죄를 지어서 곤장 몇 대를 치고 어떤 놈은 목을 쳤다는 얘기가 태반인 난중일기이지만 이 대목에서만큼은 피의 비린내와 눈물의 짠맛이 난다. 아들의 죽음은 이 냉철한 무장까지도 속절없이 무너뜨린 거야.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각별한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해.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 둘은 두 개의 완전히 다른 세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는 러시아의 소설가 투르게네프 아저씨의 말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비슷하건 그렇지 않건 정답게 어우러지기보다는 삐걱거리는 긴장 관계가 즐겨 형성해. 대개 아들의 모든 면을 포용하는 어머니와는 다른 점이지. 그래서 세상에 어머니를 껄끄러워하는 아들은 별로 없지만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거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품는 부정(父情)이 어머니의 마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어머니의 정이 항상 풍요롭게 흘러 포근하게 자식을 감싸는 강물과 같다면 아버지들의 마음은 지하수처럼 저 아래를 유영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땅을 뚫고 솟구치는 간헐천 같다고나 할까. 안 그런 척 돌아서서 애달파하고, 의연한 듯 버틴 자세 아래에서 발 동동 구르고, 애써 무심한척 하다가 남 안보는 곳에서 ‘터지고’ 마는 게 아버지의 정일 거야. 그런 모습은 예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지.

이런 아버지들의 웅숭깊은 속내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가둬 놓은 감정들이 거센 봇물로 터져 나오는 때라면 역시 자신의 팔다리같은 아니 심장 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됐을 때일 거야. 위에서 말한 이순신처럼. 사연 많고 굴곡도 흔했던 우리 역사에는 이렇게 슬픈 운명의 칼에 빼앗긴 아들을 애통해 하는 아버지들은 이순신 외에도 많았어. 그 중에 한 아버지로 일제 강점기의 경상도 안동 사람 권술조를 들 수 있을 거야. 그의 아들의 이름은 권오설. 1920년대의 걸출한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어. 권오설은 너희들도 익히 알만 한 역사적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바로 6.10 만세 사건이야.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은 경술국치 후 흔적도 없이 살다가 1926년 세상을 떠났고 독립운동가들은 그 장례식이었던 6월 10을 기해 과거 3.1항쟁과 같은 반일 운동을 기획해. 하지만 6.10을 며칠 앞두고 일본 경찰은 거사를 눈치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게 돼. 거사의 총책이라 할 권오설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조선 공산당 2대 책임비서, 즉 당의 지도자였고 어기차게 항일 투쟁을 전개해 왔던 권오설은 일본 제국주의의 눈의 가시였고 일본 경찰은 그야말로 악랄한 고문으로 권오설을 망가뜨려.

마침내 1930년 4월 17일 권오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짧지만 뜨거웠던 삶을 끝낸다. 서른 셋. 안동의 명문 권씨 북야공파 35대손 권오설, 일제가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어했던 조선 청년 권오설은 죽었어. 그리고 시골 선비였던 아버지 권술조는 아들의 참담한 죽음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어른 두 명의 키를 넘는 길다란 종이 위 제문(祭文)으로 남기게 돼.

“내가 너와 인간 세상에서 부자(父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33년인데 이 33년 사이에 부자의 정을 나눈 것이 그 삼분의 일이라도 되었겠느냐....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병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못할 것이니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도리라 하겠으며 어찌 허물이라 하겠습니까. 원통하고 슬프도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2- 권오설, 푸른역사 중)

일제 당국은 만신창이가 된 권오설의 시신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처음부터 화장(火葬)을 하라며 시신을 내어주지 않더니 장례도 양철판으로 납땜을 한 관을 쓰게 했고 무덤도 만들지 말며 조문객도 받지 말라고 강요했어. 아버지는 절규한다. 마치 너희도 아는 노래 <천 개의 바람> 가사를 외쳐 부르듯이.

“너의 밝은 혼령은 나를 따라왔느냐. 마루에 있느냐 뜰에 있느냐.... 봄의 화창함을 만나 만물과 함께 변화하였느냐. 우레가 되고 천둥이 되어 원한과 노여움을 펼치려느냐. 온화한 바람이 되고 단비가 되어 못 물로써 광야로 흘러내리려느냐.,,,, ”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들의 혼을 더듬으며 인사를 남기지. “구천에서 서로 만날 날을 기다려 다오. 이제 마음이 날로 약해지고 기운도 날로 줄어드니 이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며 너와 더불어 회포를 풀 날도 반드시 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문의 제문을 쓰면서 아버지는 얼마나 울었을까. 먹물이 묽어질만큼 피눈물을 벼루에 쏟지 않았을까. 독립운동이고 나라에 대한 충성이고를 다 떠나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은 저 기나긴 제문의 글씨 하나 하나에 서릿발처럼 배어 있고 읽는 사람의 눈을 아프게 찌르고 있단다.

작년 4월 선거에서 내가 정말 그 당선을 기뻐했던 당선자가 있었어. 내 친구냐고? 아니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야. 서울 은평 갑구에서 당선된 박주민 후보였지. 이 아저씨는 세월호 유족들을 돕고 있는 변호사야. 그리고 유세 과정에서 인형 탈을 쓰고 열심히 춤을 추면서 지지를 호소한 자원봉사자 중 몇분은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빠져나오지 못했던 아이들의 부모님들이었다고 해. “환자를 직접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고, 환자들이 즐겁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힘쓰는 일이 훨씬 보람이 있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의사도 아닌 간호조무사, 환자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꿈꾼 착하디 착한 소년 영석이 아버지도 탈을 쓰고 춤을 추셨지.

혹여나 세월호 유가족들이라는 게 선거에 누가 될까봐, ‘세월호 점령군들’이라는 기막힌 악선전을 해 대는 상대방에 악용될까봐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밝히지도 못하고, 그저 탈 쓰고 엉덩이 실룩거리면서 브이자 그려 대면서 춤을 추셨어. 탈 안에서 얼마나 우셨을까.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사람을 국회에 보내야 한다는 소박한 일념으로 몸을 흔들어대면서 영석아 영석아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할 것을...... 네 혼은 지금 내 옆에 있느냐 길거리에 서 있느냐 내내 울먹이지 않았을까.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몸으로 쓰는 제문(祭文)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나도 눈물을 흘렸어. 그리고 오랜만에 하나님께 기도도 올렸단다. “제발 저분들이 한 번은 웃게 해 주십시오. 다시 눈물 흘리더라도 잠깐만이라도 활짝 웃을 기회를 주십시오.”

그 기도는 이뤄졌지만 오늘밤 또 하나의 기도를 덧붙여 보는구나. “다시는 슬픈 아버지들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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