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자]일본이 끝내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백색국가에서 빠지면 일본에서 전략물자를 수입할 때 건건이 허가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 맘만 먹으면 일본 정부가 언제든 수출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이번 조치는 일본이 더이상 한국을 신뢰할 만한 나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의 '안보상 이유'를 대고 있지만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이러니 이번 조치는 지난해 한국 대법원이 내린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 있어 우리나라는 무역 규모로 따져보면 3위에 해당하는 주요 교역 국가이다. 일본은 한국으로 수출을 다 막겠다는 게 아니라 관리하는 거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조치는 미래 첨단 산업경쟁에서 최고의 경쟁자인 한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게 읽힌다.

지난 2일 일본의 세코 경제산업상은 "이번 규제로 일본 기업들이 피해 보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꼭 필요하고 당장 대체하기 힘든 물건인데, 반대로 일본 입장에서는 수출할 나라가 많아서 피해를 덜 볼 수 있는 물건을 골라서 규제할 수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결국 일본은 특정 물품을 넘어서 우리 경제의 기업 시스템 전체를 흔들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이 정부 들어 처음으로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가해자인 일본의 적반하장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국민들을 향한 메시지도 내놨다. 당장은 경제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에겐 이를 극복할 저력이 있다며, 자신감을 갖고 단합해 승리의 역사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우리 기업들과 국민들에겐 그 어려움을 극복할 역량이 있습니다."

자난달 31일 서울신문 곽병찬 논설고문의 <더는 '만만한 한국'이어선 안된다>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국민적 대처에 대한 답이다.

다음은 해당 사설 전문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볼 때 쓰는 안경은 여러 종류다. 안경에 따라 부각되는 면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상은 하나다. 만만한 한국, 먼저 취하는 게 임자다.

첫째 안경이 ‘흉기론’이다. 한반도의 위치와 형태가 일본 열도의 허리를 노리는 단도와 같아 누구가 손에 쥐느냐에 따라 일본이 위험에 처한다는 주장이다. 원조는 1903년 일본 외상이었던 고무라 주타로다. 그는 “조선은 예리한 칼과 같이 대륙으로부터 일본의 주요부를 향해 돌출한 반도로서 다른 강국이 반도를 점령하면 제국의 안전은 위험하게 되니 좌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뜸 들이지 말고 조속히 조선을 병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패전 후에도 우메사오 다다오는 “근대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대륙에서 조선 반도를 거쳐 일본에 뻗치고 있는 중앙아시아적 폭력을 어떻게 막아 내느냐였다”고 흉기론을 빌려 한반도와 대륙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흉기론은 어떤 형태로든 일본 국민에게 ‘혐한’(嫌韓) 및 ‘공한’(恐韓) 감정과 안보 불안감을 불러일으켰고, 자민당 등 일본의 우익 세력은 일본의 재무장과 전진방어론 등 한반도에 대한 선제적 조처를 추구할 수 있었다.

두 번째가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후쿠다 도쿠조가 1904년 발표한 논문에 처음 등장했다. 조선은 가족 단위의 고대 농노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런 미개한 상태는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일본이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타율성론이다. 미시나 쇼에이가 1940년에 쓴 ‘조선사개설’에서 주장했다.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한국사는 종속의 역사였으며, 그 결과가 한국의 정치적 사대주의, 사상적 당파성, 문화적으로는 모방성이라고 규정했다.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합리화하는 식민사학의 두 축이었다. ‘흉기’든 ‘미개한 민족’이든 “한국은 먼저 취하는 게 임자”라는 인식을 깔고 있다.

이런 인식이 고착된 데에는 허무맹랑한 논리보다 현실적 경험이 더 크게 작용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어떤 도발을 하건 한국에는 내부 협력자가 차고 넘쳤다는 경험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향간’과 ‘내간’이다. 매판 언론이나 일진회 같은 부류가 ‘향간’이요, 을사오적 같은 관리들이 ‘내간’이다.

요즘 일본의 경제 침략 속에서 한국의 향간, 내간이 그 정체를 깔끔하게 드러낸 것은 망외의 소득이다. 자신이 소속한 정당의 하는 짓이 얼마나 한심했던지 장제원 의원은 30일 이렇게 물었다. “문재인 정권 욕하는 것 말고 잘하는 게 무어냐.” 매판 언론은 공개된 자료까지 일본 정부에 유리하게 왜곡해 보도하는 등 일본을 지원했다. ‘일본 만만하게 대했다 큰코다칠 수 있다’느니 ‘일본 불매운동은 기업과 국민을 인질로 삼는 것’이라며 불매운동을 질타하기도 했다. ‘일본 상품 불매운동하자는 사람은 매국노’라고 떠드는 자도 있다.

이들의 변태적인 보도와 행태의 한결같은 결론은 ‘문재인 정부가 자초했다’는 것이었다. 합병을 거부하는 순종에게 일진회가 내놓은 성명과 다르지 않다. “다 우리가 자초한 거다. 나라가 망하게 됐는데, 황제야 나라를 바치고 우리 좀 살자.” 해법이란 것도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당시 친일 언론이 제기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시세의 대일을 모르는 장사(무지한 건달)가 아시아의 위인 이토를 죽였으니 … 빨리 가서 사과하자.’

일본이 실탄을 쏘아대는 상황에서도 그렇게 부역하고 있으니, 일본의 정한론자에게 한국은 얼마나 만만한가. 알아서 여론을 조작하고 국회를 식물로 만들어 경제를 결딴내고 문재인 정권을 파산시키려 하고…. 당장에라도 ‘꼬붕 정권’을 만들 수 있다고 볼 만했다.

그러나 상황은 110년 전과 달라도 몹시 다르다. 불매운동은 일본의 민간 기업과 지자체 그리고 정부까지 우려하는 수준으로 내달리고 있다. 혼비백산한 자유한국당이 일본 수출 규제 대책 민관정협의회에 참여하고, 상정된 지 3개월여 만에 국회의 추경 심의에 착수할 정도다.

힘의 원천은 물론 시민의 정당한 분노다. 조선 정벌을 꿈꾸는 자들에게 사법 주권까지 내주며 선처를 구걸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라. 일본 놈 일어서고 중(대)국 놈 되나온다. 조선 사람 조심하자.” 해방 정국의 민초들이 불렀다던 민요 내용처럼 다시금 내간, 향간의 내응 속에서 열강이 한반도를 놓고 각축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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