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명현 시사플러스 칼럼니스트/ 금융감독원 前 국장, 런던사무소장
"부부 관계는 서로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른 점들을 조화시켜 개인으로서, 부부로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다."
 
사전에 나오는 부부의 정의다. 그러나 부부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부부(夫婦)를 내외(內外)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통령과 영부인을 격식있게 부를 때에는 주로 '대통령 내외'로 칭한다. 대통령 부부라고는 하지 않는다. 내외는 비단 부부뿐만 아니라 부부의 가족 즉 남편과 아내의 친척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은 오늘 지인이 보내준 부부관계에 관한 글이다. 제목은 '결정권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소개한다.
 
In my house I'm the boss, my wife is just the decision maker.(Woody Allen)
  (우리 집에서는 내가 대장이고 아내는 결정권자다. )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것이 내 이야기이고 우리 집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결혼해서 얼마 동안은 그래도 내가 결정하는 게 좀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거의 없고 아내가 다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몇 년에 걸친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아내한테 밀리고 나니까 탈환할 길이 없었다. 이제는 반격을 시도할만한 힘이나 무기도 없으니 다시 찾아오는 일은 아예 포기해 버렸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험난한 투쟁의 과정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투쟁은 아주 작은 일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버스나 전철을 같이 탔을 때 여기 저기 자리가 있어서 내가 자리를 잡고 앉으면 꼭 자기가 잡은 자리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교회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좀 일찍 예배당에 가서 자리를 잡을 때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영화를 보러 가거나 음악회 같은 델 가드라도 자기가 먼저 가자고 하게 만들어야지, 내가 먼저 가자고 하면 그렇게 재미없는 걸 왜 보러 가냐고 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투쟁의 초기 과정이었고 남편을 길들이기 위한 훈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작은 일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 째째해 보여서 매번 져주고 물러섰는데 이렇게 작은 일에서 저준 것이 화근이 되어 점점 더 밀리게 되더니 결국에는 헤게모니를 잃게 되었고 모든 것을 아내가 다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power struggle의 진행 원리가 다 이런가 보다.
 
  내가 이렇게 power struggle에서 진 것을 인정해서, 우리 집의 결정권을 아내가 다 가져 간 것은 그런대로 참아주더라도 이것을 손에 쥐고 있다고 폭정을 하는 것은 참기 힘들다. Oscar Wilde는 여자의 역사는 최악의 형태의 폭정의 역사이며 이것이 약자가 강자에게 휘두르는 폭정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The history of woman is the history of the worst form of tyranny the world has ever known--the tyranny of the weak over the strong. It is the only tyranny that lasts.
 
내 옷이나 넥타이 같은 것을 내가 사 오면 어디서 그런 것을 샀느냐고 야단을 치기 때문에 아예 혼자 사러 갈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나는 아주 물건을 살 줄 모르는 사람으로 우리 집안에서 공인이 되어 있다. 결혼해서 처음 몇 년은 아내의 생일 선물을 사 주다가 얼마 안 되어 곧 포기해 버렸다. 
 
자기가 원치 않는 것, 쓸 데 없는 것을 사왔다고 핀잔을 주니 내가 머리를 쓰고 정성을 들여서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사고 싶은 것 사라고 돈을 주면 되는 것으로 굳어졌다. 어디 나들이를 하거나 여행을 가고 싶어도 몸도 시원치 않은 사람이 그렇게 나다니면 안 된다고 決裁를 안 하니 갈 생각을 안 한다. 꼭 자기가 같이 따라가서 돌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친구들이 부부 동반 여행을 가자고 해도 아예 내 아내에게 먼저 물어보라고 한다. 내 칠순 때 구라파 여행을 보내주겠다는 아들의 제의에 내가 비엔나를 가보게 되어 좋다고 기뻐했는데 아내의 결재가 안 나서 보류되었다. 내 아내가 가까운 데를 가더라도 손자 손녀와 함께 비행기 타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아들 둘이서 目下 고민 중이다. 
 
손자 손녀를 다 데리고 가려면 엄마 아빠가 따라가야 함으로 10명이 함께 움직이는 여행이 될테니 비용도 만만치 않겠지만 아들 둘이 각각 자기 직장에서 받는 휴가기간을 같은 날짜로 맞추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모든 결정을 아내가 다 해버리니까 나는 따라가기만 하는 줏대 없는 사람이 되었고 결단력 없이 눈치만 보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내 아내는 또 내가 이렇게 변한 것이 싫다고 불만이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자기인데도 말이다. 내 아내만 이런 것에 불만인 줄 알았더니 많은 여자들이 그렇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글이 말해준다.
 
  Why does a woman work ten years to change a man's habits and then complain that he's not the man she married?
  (왜 여자는 남편의 습관을 10년이나 걸려서 고쳐놓고 나서, 남편이 결혼할 당시의 사람이 아니라고 불평을 할까?)
  Most women set out to change a man, and when they have changed him they do not like him.
  (대부분의 여자들은 한 남자를 변화시키려 하고 나서, 막상 변화됐을 때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위의 말들이 joke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말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본다. Bernard Shaw는 진실을 말하는 joke가 제일 재미있는 joke이고 그것이 자기의 방식이라고 했다.
 
  My way of joking is to tell the truth. It is the funniest joke in the world.
 
왜 내가 이렇게 헤게모니를 잡는데 실패해서 결정권을 다 뺏겨버렸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다.
 
  Once made equal to man, woman becomes his superior.
 
여자란 남자와 평등하게 대해 주면 꼭 남자의 상관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내를 처음부터 평등하게 대해 주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결론은 남자가 자기보다 못난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만 둘 사이의 평등을 이룰 수있다고 한다.
 
  The wife should be inferior to the husband; that is the only way to insure equality between the 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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