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대립과 갈등의 한국 사회에 소통, 화해, 용서 등의 메시지를 남기고 18일 한국을 떠났다.

30여년 전 요한 바오로 2세 전 교황의 필리핀 방문은 필리핀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역시 한국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바오로 2세는 재임 기간 필리핀을 2차례 방문하는 등 '필리핀 사랑'이 남달랐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톨릭과 가장 가까운 국가로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도이다.

지난 1981년 2월17일 바오로 2세 교황의 첫 필리핀 방문 당시 필리핀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킨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에 저항하는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었다. 교황의 필리핀 방문은 독재자 이미지에 변화가 필요했던 마르코스가 먼저 요청했다. 하지만 바오로 2세 교황은 먼저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고 결국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해제한 후에야 교황의 필리핀 방문이 성사됐다.

계엄령 해제는 필리핀에 거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꽃피우게 했다. 그 선봉에 섰다 미국으로 추방됐던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는 교황 방문 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가 또다시 당선되자 이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마닐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는 결국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필리핀의 거리는 아키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으로 가득 찼다. 마치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이 노란 리본의 물결로 가득 찼던 것처럼.

그의 암살 사건 후 1986년 2월25일 필리핀 국민들은 노란색 옷을 입고 단상에 선 여인을 주목했다. 그의 부인이던 코라손 아키노가 필리핀의 새 대통령으로 "나라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부디 정부 관리의 행동을 잘 감시해 달라"는 대통령 취임 연설을 했다. 그녀는 '불복종 비폭력'의 원칙을 내세우며 굳건한 도덕적 기반을 토대로 온건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부정부패를 몰아낼 것을 약속했고 경제를 다시 회복시켰다.

1995년 1월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번째 필리핀 방문 때 상황은 첫 방문 때와는 사뭇 달랐다. 아키노 정부에 이은 피델 라모스 정부는 필리핀의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내고,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필리핀 가톨릭 교회도 변화하는 사회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독재 정부를 반대하는 혁명 때에도 가톨릭 교회는 단식투쟁으로 동참했고, 독재자를 몰아낸 뒤에도 필리핀의 부정부패 척결에 기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첫 아시아 방문지로 정한 이후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놓고 다양한 추측들이 나돌았다. 교황에게는 국교가 가톨릭인 필리핀이나 한국보다 200년 먼저 가톨릭이 전파된 일본이 한국보다는 더 아시아 첫 방문국으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월호 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라 전체가 팽팽한 대립에 처해 있고, 국민들이 정치와 경제적 상황에 대해 큰 실망감,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교황의 한국 선택은 전혀 의외의 선택이 아니다.

빈자의 교황, 약자의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택한 이탈리아의 첫 방문지 람페두사 섬, 첫 해외 방문지 브라질의 바르지냐 모두 빈곤과 죽음 및 그 문화로 약자들의 눈물이 넘치는 곳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땅을 밟은 때에도 떠날 때에도 한국의 여러 문제를 반영하는 종합세트인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를 위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교황은 서울공항에서 마중나온 세월호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마음 속에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위로의 말을 전했고, 노란 리본 배지를 달고 미사를 집전했고, 유가족에게 자신의 이름 '프란치스코'로 세례를 줬다.

교황은 신자와 비신자를 떠나, 국가 지도자부터 일반 국민까지 모두를 향해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공동선과 진보", "독백이 아닌 열린 마음으로 하는 대화", "행동으로 실천하는 정의" 등 가르침과 당부를 남겼다.

100만 인파가 운집했던 교황 신드롬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에 직접적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가르침도 망각될 것인지는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꽃축제 등 대형 행사에서 안전사고와 쓰레기 문제 등이 매년 반복되며 시민의식 문제가 제기됐던 것과 달리 100만 인파가 모인 광화문 시복식 행사는 무질서·쓰레기·사고 없는 3無 행사로 마무리졌다. 교황 방문 이후 세월호 유족 농성 천막을 찾는 시민들도 부쩍 늘었다. 교황 방한이 가져온 희망적 신호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람페두사섬과 브라질의 바르지냐 빈민가, 그리고 한국에서 세월호 유족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과 만나 강조한 것은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한국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랑 그리고 교황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한다면 한국의 변화가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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