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우 김우중
26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비망록 '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출간됐다.

올해로 대우그룹이 해체된지 15년이 지났다. 저자 신장섭 교수는 김 전 회장과 20여 차례, 150시간 이상 직접 만나 대우그룹의 성장과 해체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에서 신 교수는 "해체 과정에서 대우는 한국의 최대 부실기업으로 낙인찍혔다"며 "대우 해체와 한국경제 구조조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점에 출발 '역사 바로잡기' 작업을 별였다"고 밝혔다.

<시사플러스>는 총 6편의 시리즈로 '김우중과의 대화'의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대우 '기획해체설' 30조 손실…"대우차 재평가 해야"

김우중(78) 전 대우그룹 회장이 재계무대에서 사라진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났다. 글로벌 리더,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그가 밝힌 대우그룹의 해체는 '대우 기획 해체설'로 요약된다.

그동안 대우그룹 해체에 대한 정설은 '대우그룹이 세계경영을 모토로 확장 투자를 벌이다 대우자동차의 부실로 몰락했다'는 것.

하지만 김 전 회장과 신 교수는 이에 대해 정면 반박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GM이 대우를 거의 공짜로 인수했다고 주장한다.

GM에 부실자산을 다 빼고 우량 자산만 골라가질 수 있도록 한 데다 1조원 이상을 투자한 신모델도 그냥 넘겨주는 등 과도하게 특혜를 제공했다는 것.

특히 GM이 현찰 4억 달러밖에 내지 않았는데 산업은행이 20억 달러 자금 지원에 나섰다는 점에 대해서도 공정하지 못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김 전 회장은 "후발주자였던 GM의 중국합작사 상하이GM은 대우차 덕분에 중국시장에서 혁혁한 성공을 거뒀다"고 밝혔다.

책에 따르면 상하이GM은 2010년 230만 대의 자동차를 팔아 GM의 미국 자동차 판매량을 앞질렀다. 특히 GM의 중국 성공을 이끌었던 '뷰익 엑셀(Buick Excelle)'은 대우가 개발한 '누비라(라세티)'를 그대로 가져가서 판매한 것이라는 것이다.

대우의 마티즈 역시 '쉐보레 스파크(Chevrolet Spark)'로 이름만 바꿔 성공가도를 달렸다. "GM이 1997년에 세웠던 전략대로 대우가 개발한 소형차를 이용해 중국이라는 거대 신흥시장에서 성공신화를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김 전 회장은 "정부가 대우자동차를 잘못 처리해서 한국경제가 손해 본 금액이 결과적으로 210억달러(약 30조 원)가 넘는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우리를 워크아웃에 집어넣으면서 실사했을 때 청산 가치로 나쁘게 평가했는데도 대우차 자산 가치가 110억불(약 13조원)가량 나온 것과 비교하면 한국 경제가 110억불의 돈을 날린 셈"이라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은 "한국 자동차 산업 구도를 봐도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의 2사 체제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독과점 체제가 됐다"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대우자동차를 실패한 투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대우 해체에 따르는 비용은 한국경제가 고스란히 부담했고 투자 성과는 GM이 다 가져갔다"며 "대우 해체는 실패한 정책이 된다. GM의 성공은 숨기고 싶은 진실이 된다"고 밝혔다.

또 이 밖에도 김 전 회장은 이후 해체된 대우의 각 계열사가 대부분 정상화됐다는 점을 들어 당시 대우를 부실로 낙인 찍은 것이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대우의 몰락…경영 실패인가? 정부 기획해체인가?

김우중 회장은 대우의 경영을 실패한 것일까?아니면 경제관료들이 자금줄을 묶어놓고 부정적인 시장 분위기를 만들어 기획 해체시킨 것일까?

김 회장은 경제관료들이 대우를 '부실기업'으로 몰고 갔다는 소위 '기획 해체론'을 주장했다.

1997년 DJ는 김 회장과 경제관료들을 경합시키고 양 쪽의 얘기를 다 들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1998년 7월 금융감독위원회는 'CP 발행 한도 제한조치'와 10월 '회사채 발행 한도 제한조치'를 내린다.

회사채 발행 제한 조치 이틀 후 노무라 증권에서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금융권은 본격적으로 자금회수에 들어갔다.

강봉균 경제수석은 1997년 11월28일 김 회장이 DJ를 만나기 직전에 '김우중 회장 접견 자료'를 DJ에게 제출한다. 이 보고서는 대우그룹의 총차입금이 1997년 말 28조7000억 원에서 1998년 9월 말 47조700억 원으로 9개월 사이에 19조 원이나 늘어난 사실을 강조했다.

강 수석은 "단기부채가 계속 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이익 산출의 투명성에 의문이 크다"며 "밀어내기식 수출과 이로부터 창출된 매출채권을 기반으로 운전자금을 조달하는 형태를 지속했다"고 밝혔다.

대우가 '부실'로 인해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고 있는 상황에서 가공수출을 늘려 자금난을 넘기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DJ는 경제관료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우에 대한 금융권의 자금회수가 이어졌고, 1999년 8월 '워크아웃'으로 처리된다.

대우의 유동성 위기에 대해 김 회장은 본말(本末)이 전도(轉倒)됐다고 말한다.

수출금융이 막혀서 16조 원이 갑자기 필요해졌고 금융권이 BIS비율 맞추기 등 자신들의 구조조정을 하면서 3조 원의 대출을 회수해 갔다는 것이다.

대우의 잘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외부 여건 때문에 할 수 없이 19조 원을 조달해야 했는데 이것이 왜 '기업부실'의 증거냐고 반문한다.

김 회장은 "그 당시 우리가 수출금융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던 것에 대해 정부나 언론에서는 대우가 무슨 큰 특혜를 요구하는 듯이 얘기했는데 절대 아니다"면서 "통상적인 금융을 정상화해 달라는 것이었을 뿐이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은 정부나 금융기관에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에 따라서 활동을 한다"면서 "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 왜 기업 잘못인가. 시스템 고장 난 걸 고쳐달라는 것이 왜 특혜를 요구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김 회장은 경제 관료들이 자금줄을 묶어놓고 대우에 부정적인 시장 분위기를 만들면서 대우를 '부실기업'으로 몰고 갔다는 소위 '기획 해체론'을 주장한다.

그는 "정부에서 갑자기 수출이 나쁜 것처럼 얘기하고, 수출금융이 막혀 벌어진 일들을 우리가 잘못한 걸로 몰아붙이는 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장병주 당시 대우 사장도 "정부 측에서는 우리가 자금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수출을 늘려서 금융을 일으켰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였다"며 "그렇지만 실상은 수출금융이 막혔기 때문에 수출할수록 돈이 많이 필요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김 회장은 정부의 '밀어내기식 수출' 주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그러면 현지법인에 과잉재고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라면서 "워크아웃 하고 삼일회계법인이 실사 나왔을 때 그런 것 잡아냈어야 하는 것 아닌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런 재고에 대해서 아무 얘기 없다"고 지적했다.

김 회장은 삼성과의 자동차 빅딜 무산, 사재출연과 워크아웃 과정에서도 경제팀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전했다.

그는 "경제관료들이 나를 제거하려는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며 "DJ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대우와 삼성 간의 자동차 빅딜을 적극 밀었지만 경제관료들은 빅딜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김 회장이 사재 1조 3000억원을 포함해 총 13조 원의 자산을 채권단에 내놓고 마지막 회생 작업을 할 때에도 정부 측이 10조 원의 자금지원을 약속한 뒤에 4조 원 밖에 주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경제정책 최고 책임자들이 즉각적으로 대우와 김 회장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쏟아내 '워크아웃'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대우그룹을 청산가치로 실사해 30조원이나 자산가치를 낮춰서 '부실기업'으로 낙인찍고 경영권 박탈과 워크아웃을 합리화했다"고 강조했다.

김우중-관료, 금융위기 극복방안 두고 갈등

"(김 회장이)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두고 관료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역사가 사실과 전혀 다르게 기록됐다."

대우와 제너럴모터스(GM)간 합작 협상은 대우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로 인해 결렬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한국 금융위기 초반부터 대우차는 성공 직전에 있었고, 다급한 GM이 대우에 자동차 합작을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고 정부 측에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한다.

대우 해체 후 국내외 자리잡고 있는 '정사(正史)'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위기 처리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 평가받는 DJ정부 경제실록 '금고가 비었습니다'는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니까) 대우는 옛 사업 파트너였던 GM과의 전략적 제휴 카드를 빼든다.… 대규모 외자 유치로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을 넘길 수 있으리라는 포석이었다"고 단정지었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2012년 발간된 회고록에 "… 김우중 대우 회장은 GM과의 전략적 제휴에 모든 걸 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애초부터 불가능한 협상이었다. 대우의 오랜 협력·합작사였던 GM은 대우의 사정을 김 회장만큼 잘 꿰고 있었다…조건을 바꿔 가며 질질 끌더니 1998년 7월 협상을 깨고 만다"고 썼다.

이헌재 씨는 대우차가 "기술 자립이 어려웠다"라고도 강조했다.

김 회장이 관료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은 정부 측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경제정책에 대해 조언하다가 DJ의 신임을 받는 '경제대통령', 전국경제인연합회 차기 회장으로 경제정책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부터다.

DJ에게 김 회장은 IMF 체제 당시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구조조정론과 다른 견해를 들을 수 있는 믿음직한 인물이었다. 김 회장은 재계 2위인 대우그룹을 키워낸 신화적 존재이자 금융위기가 빈발했던 신흥국에서 사업을 개척한 선구자로서 금융위기와 관련된 실물경제, 정책 등에 관해 누구보다도 해박했다.

게다가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차기 회장으로서 실질적 회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DJ가 실물경제 부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파트너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과정에서 경제관료들과 크게 충돌했다.

김 회장은 관료그룹과 달리 '연간 무역흑자 500억 달러 달성을 통한 IMF체제 조기탈출'이라는 해법을 내놓았다. 또 한국은 금융위기를 맞았지만 세계경제는 괜찮은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런 환율에서는 돌을 팔아도 수출할 수 있다"며 1조 달러에 달하는 국내 생산설비를 최대한 돌려 수출을 대폭 늘리고 고용을 유지하면서 위기를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김 회장의 주장은 맞아떨어졌다. 정부는 1997년초 연 28억 달러의 무역흑자 밖에 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416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김 회장과 관료 간 충돌은 금융위기 극복 철학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지만 감정 대립으로 치달았다.

김 회장은 공개석상에서 "관리들이 열심히 안 한다. 자기 할 일을 안 하고 핑계만 댄다. 이래서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자기들이 못하면 자리를 비켜줘야지…. 그러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데, 안 비켜줘서 할 일도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 쪽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우에 대해 나쁜 보고가 올라갔다"고 한다.

대우 해체와 한국경제 구조조정

 "내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과정에서 경제 관료들과 크게 충돌했다. 금융 위기 극복에 대한 철학의 차이지만 결국 감정 대립까지 갔다."

김우중 전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통해 대우그룹 해체는 국민의 정부 신흥 관료와의 첨예한 갈등이 배경이었음을 밝혔다.

그는 당시 취임 초기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에게 '경제 대통령'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전했다. 자신은 국제통화기금 프로그램에 따른 구조조정보다는 '연간 무역흑자 500억 달러 달성을 통한 국제통화기금 체제 조기탈출론'을 내걸었고 이 과정에서 충돌이 많아지면서 관료들과 멀어졌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 전 회장은 공개석상에서 "관리들이 열심히 안 한다. 자기 할 일을 안 하고 핑계만 댄다. 이래서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자기들이 못하면 자리를 비켜줘야지…. 그러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데, 안 비켜줘서 할 일도 못하게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러자 "청와대 쪽에 하루가 멀다 하고 대우에 대해 나쁜 보고가 올라갔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경제팀의 무리한 구조조정 처방으로 우리 기업과 우리 경제가 엄청난 기회를 잃었음을 강조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세계경제가 호황이었다. 관리들이 길게 보지 못했다. 20년 이상은 예상하고, 10년은 내다보면서 정책을 세워야 하는데. 그 때는 외국 금융기관, 컨설팅 회사들이 내놓는 보고서들만 쳐다보고 얘기했다. 우리가 세계경영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면 2000년대에 크게 열매를 거둘 수도 있었다. 결국 그 열매들은 (대우 등을) 인수한 외국투자자들이나 출자전환 해서 들어온 금융기관이 다 갖고 갔다."

또 김 전 회장은 대우 뿐만 아니라 다른 금융기관과 기업들도 구조조정이란 명분 아래 헐값 매각해 국가경제에 큰 손실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보니까 너무 싸게 팔았다는 것들이 많지 않는가? 그래서 지금까지 국부(國富) 해외유출 문제가 나오는 거다. 우리가 그렇게 싸게 판 것이 산 사람들 입장에서는 큰 이익이다. 그 사람들은 '한국이 문제 많다, 구조조정 해야 한다'라고 자꾸 얘기해서 좋은 매물이 싸게 나오면 자기들에게 좋은 거다."

김우중 "김일성, 김정일과 20차례 만나"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시장을 열기 위해 김 전 회장이 북한에 드나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김 회장의 진짜 관심은 남북관계 개선 자체에 있었다는 게 신 교수의 설명이다.

김 전 회장은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재임 기간(1988~1998년) 북한 김일성 전(前) 주석,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20여 차례 만났다"고 밝혔다. 그 과정 속에서 김 전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대북특사'로 일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91년 12월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채택, 서명·발효된 합의서로, 남북한의 화해와 공존, 통일을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합의서는 남북 양측의 국호와 서명자의 직책을 처음 명기해 상호 인정의 토대를 마련하고, 남북관계가 정상적으로 접어드는 기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회장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토대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 전 회장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은 정상회담을 전제로 추진됐다"며 "성사됐다면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될 뻔 했다"고 전했다.

또 김영상 정부 시절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고 김 전 회장은 설명했다. 1994년 6월 북한 핵문제가 위기상황에 돌입하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당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김일성 전 주석의 동의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이 많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 전 주석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김영삼 정부의 조문 거부로 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됐다.

김우중 그는 누구인가

"나는 나이가 들고 직접 할 수 없으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나 대신 세계에서 사업할 수 있도록 키우는데에 내 여생을 바치려고 해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집필한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젊은이에 대한 애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김 전 회장은 대우 패망 전 젊은이들의 우상 중 하나였다. 대우의 창업과 성장 과정에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할 이야기들이 많았기 때문.

김 회장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싱가폴에 가서 당시 한국 전체 봉제업체들이 갖고 있는 모든 기계를 돌려도 1년에 생산해내지 못할 물량의 수출주문을 따내 대우그룹의 기초를 쌓았다.

이후 한국기계, 옥포조선소 등을 정상화시켜 '부실기업 해결청부사'로 떠올랐고 리비아에서 물품대금으로 받은 원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제석유거래의 큰 손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젊은이들과 직접 대화하기를 즐겼다. 1989년 출간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부제를 '내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로 붙였을 정도. 학생운동을 하다가 ''빨간줄'이 그어져 취직을 못하던 젊은이들을 대거 채용해 세계경영 전선으로 내보낸 이도 김 전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2012년 글로벌 YBM(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s) 과정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대우인'처럼 조련하는 있다. 동남아에 뿌리를 내려 국제 비즈니스를 제대로 할 젊은이들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 강의도 하고 정신교육, 생활지도까지 한다.

졸업한 학생들도 정기적으로 만나 격려하고 취직한 회사에서 잘 정착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김 회장은 GYBM이 한국의 청년실업 해소에 조그맣게라도 기여하면서 한국경제의 국제적 기반을 다지는 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는 이걸 내가 마지막 흔적을 남기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10년이나 20년 후 학생들이 창업해서 성공한 CEO가 되어 있든지, 좋은 회사의 중역이 되었을 때까지 내가 다행히 살아 있어서 그 회사들을 다녀보게 되면 그게 얼마나 가슴 뿌듯하겠어요?이 친구들이 결혼해서아이들을 낳으면 그것 축하해주러 집에도 가고, 같이 밥도 먹고 … 그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지요.이제 나는 나이가 들고 직접 할 수 없으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나 대신세계에서 사업할 수 있도록 키우는 데에 내 여생을 바치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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