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명현 시사플러스 칼럼니스트/ 금융감독원 前 국장, 런던사무소장​
나명현 시사플러스 칼럼니스트/ 금융감독원 前 국장, 런던사무소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는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받아내려던 당초 목표를 이루는데 실패했다. 다섯  달이 지난 현재도 군사적으로 한참 열세인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 전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러시아 졸전의 원인은 여러 개가 꼽힌다. 그중 우크라이나군을 거세게 밀어붙일 것으로 예상했던 러시아 전차가 서방이 지원해준 대전차 무기에 무기력하게 당한 게 대표적이다. 여기서 러시아 전차의 무기력한 전투로  전차 무용론이 또 다시 나왔다. 

'무용론'은 말 그대로 '어떠한 것이 쓸모 없다'는 것이다. 사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쓸모가 없어지는 것들도 많이 있으며 마냥 틀렸다는 것과는 다르다. 밑 항목들을 봐도 다들 각각의 근거가 있으며 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근거의 설득력이 높아지면 결국 무용론의 대상은 정말로 무쓸모하다고 판정되어 퇴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불확실성이 커진 디지털 환경에서 정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 항상 현실 상황이 처음 세웠던 계획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획은 일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그러므로 계획은 대략의 방향만 세워 일을 시작하고, 상황 변화에 따라 빠르게 바꾸는 게 현명하다.

오늘 한 예(받은 글)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인 중위가 겪은 일이다.

그의 부대는 스위스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소규모 정찰대를 꾸려 알프스 너머 프랑스 쪽 상황을 빠르게 순찰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10명도 안 되는 인원이 멀리서 적의 동선만 파악하는 것이므로 저녁 때까지 돌아올 수 있는 임무였다. 그래서 비상식량을 준비하지 않고 출발했다. 그런데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알프스에서 눈은 금세 눈보라로 바뀌었고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눈보라가 계속됐다. 젊은 소대장은 눈이 오후까지는 그치겠지 하는 생각에 눈사태를 피할 수 있는 돌출부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눈은 밤새 계속됐고 다음 날까지 계속 내렸다. 백 년에 한 번 정도 찾아오는 눈보라였다.

하룻밤이 지나자 각자 소지하고 있던 식량이 동이 났기에 소대원들은 불안해졌다. 3일째에 눈이 그치기 시작했지만 흐린 날씨와 눈보라로 방향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1미터 훨씬 넘게 눈이 쌓여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 소대원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군인 중 한 명이 조금이라도 먹을 것이 있나 하고 찾다가 배낭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도 1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알프스의 옛 지도였다. 그가 알프스 지도를 찾았다고 말하자 좌절해 있던 소대원들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에 마음이 들떴다. 소대장은 부대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채비를 갖췄다. 지도에서 그들의 위치를 참조하고 최저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 미끄러지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마침내 해질녘이 되자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나타났다. 드디어 소대는 부대로 가는 길을 찾았다. 부대에 도착한 후 소대원들은 불로 몸을 녹이고 음식을 급하게 입에 넣으며 굶주림을 달렸다.

부대장이 이들의 무사 기원을 축하하러 찾아왔다. 그는 어떻게 이런 극심한 눈보라를 뚫고 귀대했는지 물었다. 알프스의 옛 지도를 사용했다고 말하자, 부대장은 그 지도를 보여달라고 했다. 등불을 비춰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놀라서 소스라치게 소리쳤다. 

“아니, 이건 알프스 지도가 아니라 피레네산맥 지도가 아닌가!”

이 일화는 ‘비타민 C’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알베르트 센트 죄르지’ 헝가리 세르게대학 교수가 직접 겪은 실화라고 한다.

조직심리학의 그룹 칼 와익(Karl Weick) 교수가 이 일화를 경영학계에 소개해 유명해졌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전략은 정밀성이나 완결성이 아니라 출발점을 제공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다. 이 일화에서처럼 길을 잃었을 때는 어떤 지도라도 쓸모가 있다. 머뭇거리지 않고 출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헝가리 부대 정찰팀의 이 일화는 기업 경영에서도 ‘비전의 역할’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정찰대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절망적인 상황일 때 발견된 지도는 대원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러나 지도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눈보라를 이기고 기지로 돌아오게 만든 동인은 대원들의 목표 의식과 긴밀한 팀워크였다. 기업의 비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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