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 최대 고비는 '독과점 심사'

북중미·유럽 출장을 마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1일 오후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북중미·유럽 출장을 마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1일 오후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를 통해 귀국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재원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형 인수합병(M&A)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영국 반도체 기업 ARM사와 관련해 “다음 달 손정의 회장께서 서울에 오신다. 그때 (인수) 제안을 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연내 회장 승진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는 “회사가 잘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2주간의 해외출장 일정을 마치고 21일 오후 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에 도착한 이 부회장은 취재진과 만나 삼성전자의 대형 M&A 진행 과정 일부를 설명했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 목적과 관련해서는 “오지에서 어려운 환경에도 정말 열심히 회사를 위해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근무하고 있는 임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특사 임명을 받아서 이후 영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여왕이 돌아가셔서 일정이 조금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래도 세기의 장례식이라는데, 존경하는 여왕님 장례식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같은 도시에서 추모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인수 최대 고비는 '독과점 심사'

삼성전자가 ARM(암) 인수전에 뛰어든다면 가장 큰 난관은 '독과점 심사'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앞서 미국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무산된 것도 역시 세계 각국 규제당국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업계 M&A(인수·합병) 시장은 최근 수 년간 숱한 실패 사례들을 남겼다. 하나 같이 세계 규제당국의 독과점 심사 벽을 넘지 못해서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불발된 것 외에도 반도체 웨이퍼 점유율 3위 업체인 글로벌웨이퍼스는 4위인 독일의 실트로닉을 인수하려다 불발됐다. 

특히 각국의 기업결합 심사가 한층 엄격해졌다. 반도체 M&A 결과로 기술·생산능력이 유출될 수 있는 만큼 각국 경쟁당국은 결정이 더 신중해졌다. 

자국 주력 산업의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로 승인을 내주지 않는 사례도 있다.

엔비디아의 ARM 인수 무산 역시 각국 경쟁 당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해석된다. 각각 모바일과 그래픽칩 분야의 절대 강자인 두 회사가 합치면 시장 지배력이 과도해진다는 우려 때문에 승인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엔비디아는 그래픽 카드(GPU) 설계 업체로, 메모리 반도체의 매출이 70%가 넘는 삼성전자와 동일선 상에서 보기 어렵지만 규제 당국의 서슬 퍼런 심사를 고려하면 M&A에 난관이 예상된다. 

엔비디아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이번 ARM 인수전은 여러 국적의 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해야 한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여러 반도체 기업들이 ARM에 대한 공동 인수 의향을 밝힌 상태다. 

SK하이닉스 박정호 대표이사 부회장은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여러 국가의 업체들과 공동 컨소시엄을 구성해 ARM 지분 확보로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최고경영자)도 "경쟁사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ARM 지분을 확보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 ARM 지분 인수에 관심을 보여온 팻 겔싱어 인텔 CEO도 지난 5월 이재용 부회장과 서울에서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일각에선 인텔이 삼성전자에 ARM 인수전 공동 참여를 요청했을 것으로 관측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100조 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몸값과 규제 당국 심사 등을 고려했을 때는 암사를 단독으로 인수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됐다"면서 "최근 컨소시엄 구성 논의가 곳곳에서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다만 ARM을 공동으로 인수할 경우 업체들이 기대하는 사업 경쟁력 강화와 기업가치 제고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더욱이 최근 ARM의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평이다. 

현재 퀄컴, 애플, 인텔, AMD 등 대부분의 반도체 제조사들이 암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설계 전체를 가져오거나 일부를 차용하는 방식으로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설계 자산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오픈 소스(소스 코드 무료 공개)인 '리스크 파이브(risc-v)'를 반도체 개발에 채택하는 경우가 급격히 늘고 있다.

현재 ARM이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 모바일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앞으로 클라우드 등 미래 반도체 산업에서는 시장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왜 ARM을 인수하려 하는가

ARM(암)은 영국 반도체 설계자산(IP, Intellectual Property) 업체다. 1990년 설립된 이 회사는 삼성전자 같은 반도체 기업이나 퀄컴 같은 반도체 설계 업체와는 또 다른 수익 모델을 갖는다. 

바로 반도체 업체들에게 반도체 설계도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받아 수익을 얻는다.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퀄컴도 ARM의 아키텍처(설계도) 라이선스를 구매해 자체 규격에 맞게 변경해 사용한다.

ARM은 당초 컴퓨터 CPU(중앙처리장치) 구조를 개발하기 위해 설립됐지만 우여곡절 끝에 반도체 IP 설계 업체로 자리 잡았다. 전 세계 스마트폰의 95%가 ARM이 설계한 반도체 IP를 사용한다. 세계 각국에서 500개가 넘는 반도체 업체들이 ARM의 반도체 IP를 도입하고 있을 정도다. 

이 때문에 ARM은  전 세계 반도체 제조업체들을 두루 고객사로 두고 있다.  ARM은 직원이 6,000명 정도로 분기 매출은 7억 달러 선으로 알려졌다.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은 일찌감치 ARM의 성장성을 주목했고, 2016년 7월 243억 파운드(당시 한화 36조 원)을 주고 ARM을 매입한다. 

하지만 손 회장이 ARM을 인수한 이후 ARM에게 자체 반도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지만 ARM은 반도체 설계 IP만 제공한다는 수익모델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손 회장과 ARM이 갈등을 빚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급기야 2020년 9월 전 세계 그래픽처리장치의 강자인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려 했지만 세계 주요국의 독과점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며 인수가 좌절됐다. 

ARM은 PC 칩과 모바일 칩은 물론 자체 서버 시장도 적극 공략하고 있다. 특히 ARM 기반 모바일 기기와 호환성이 좋은 ARM 기반 클라우드의 발전은 ARM이 PC, 모바일, 서버를 아우르는 반도체 생태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했다는 진단이다. 

ARM은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사업 확대 의지와도 연관이 깊다.  이전까지 삼성전자 같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는 세트(완성품) 업체의 주문대로 반도체를 만들어 공급하는 역할만 해왔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앞으로 정보통신(IT) 기기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중심 역할을 하는 '메모리 센트릭(Memory Centric) 컴퓨팅'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선 ARM의 시스템 반도체 아키텍처가 필수라는 평이다. 

일부에선 삼성전자가 ARM 인수를 추진한다면 인텔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의 반도체 업체들과 컨소시엄을 이뤄 독과점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반도체 전문가들은 만약 삼성전자를 비롯해 미국 등 세계 주요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컨소시엄으로  ARM 인수에 나설 경우 중국 경쟁 당국이 인수를 반대할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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