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마친 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마친 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심일보 대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한·미·일 군사훈련을  “극단적 친일 국방”이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15일 중앙일보는 현재 급변하고 있는 외교·안보 이슈에 과거 역사를 소환해 ‘역사 논쟁’으로 치환하는 방식으로 이 대표의 접근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했다. 

앞서 이 대표는 지난 1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11일) “일본은 과거 (북한의)남침 5년 전까지 한국을 무력 지배했던 나라다”(7일),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進駐)하고, 욱일기가 다시 한반도에 걸리는 일이 실제로 생길 수 있다”(10일)는 식으로 역사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다.

메체는 "하지만 이 같은 접근법에 대해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한·미·일 군사훈련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역사 얘기를 얹으니 일종의 이념 논쟁이 돼버렸다”(민주당 관계자)는 게 대표적이다. 당 일각에선 이 대표가 내걸어 온 ‘민생 제일주의’와 모순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몇몇 민주당 의원들은 최근 이 대표에게 이 같은 우려와 함께 “다시 민생이슈 중심으로 해달라”고 건의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 대표가 현안을 얘기하면서 역사를 소환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민주당 대선 경선 당시 자신을 둘러싼 적통(嫡統) 논란이 일자, 외려 자신을 고려 시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천민 망이·망소이에 빗대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한 라디오 방송에서 “저는 망이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그 망이는 처형당하고 성공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민주사회니까 서민들이 (적통이나 성골이 아닌) 아웃사이더를 더 좋아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8·28 전당대회 국면이던 지난 7월엔 강원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을 찾아 자신을 조선 중기의 문인 허균에 빗댔다. 그는 “개혁의 열망이 크면 혁명이 일어나거나 제거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며 “허균 선생이 제거된 것은 혁명시도를 하면 ‘이렇게 된다’고 보여주려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수면 위로 드러나던 시기였는데, 정치권에선 “붕당 정치의 희생양으로 광해군 때 처형당한 허균에 빗대 자신을 변호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필자의 생각을 콕 짚어 정리해주는 글인 듯 싶어 인용했다. 그러면서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가 오버랩 됐다.

"다시 질서 있는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근면하고 활기찬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독일 만으로도 무엇이든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들을 지난 3년간 이루어 내었습니까? 독일 민족이 세계의 어떤 민족과 비교해도 떨어지는 점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왔습니다.

우리들이 해온 일이 얼마나 칭찬 받을 일입니까. 얼마나 숭고한 계획을 진행시켜 왔습니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로를 짓고 거대한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수없이 많이 발명한 물건들과 수많은 주택가를 짓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우리 민족의 업적은 다른 민족과 비교해도 뒤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독일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패자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계는 이제 우리를 재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만 종속될 것입니다!

국민들이여! 만약 내가 해온 일이 올바르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실히 일해왔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국민들을 위해 일어나 권력을 똑바로 사용했다고 생각한다면, 부디 나에게 투표해주길 바랍니다. 내가 국민들을 위해 힘차게 일어섰던 것처럼!"

히틀러는 괴벨스와 함께 청중을 압도하는 이같은 연설과 경이로운 선전능력을 발휘하여 동네 소수정당에 불과했던 나치당을 제1당으로 일으켜 세웠고 정권을 장악한 후 총리직과 새로 얻은 대통령직을 합쳐 제3제국의 퓌러(Führer: 지도자, 영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이를 총지휘했다. 또한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600만 대학살의 주모자였다.

이같은 히틀러의 '성공'에는 1차세계대전의 전사자 무리(군중)의 분노를 불러내는 탁월한 재주가 시작이었다. 그는 빈에서 부랑생활을 하던 시절, 그림을 팔아 먹고 살았다. 그는 바로크 건축물을 보며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카네티의 <말의 양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히틀러의 건축물들은 거대한 거대한 규모의 구중을 끌어들이고 묶어두기 위한 것이다. 군중을 만들어 냄으로써 권력을 얻었지만 그는 거대한 군중이 얼마나 쉽게 붕괴하는 경향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을 제외하고 군중의 붕괴를 저지하는데 효력을 갖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군중의 성장이고 둘째는 성장의 꾸준한 반복이다. 인류 역사상 몇 안되는 군중경험자로서 히틀러는 군중의 형태와 동원수단을 훤히 알고 있었다"

히틀러의 생애를 보면서 소년공 출신인 이재명 대표의 불우했던 성장 과정과 대장동·쌍방울 의혹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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