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44일째인 20일(현지시간) 런던의 총리관저(다우닝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리 사퇴를 발표하고 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44일째인 20일(현지시간) 런던의 총리관저(다우닝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리 사퇴를 발표하고 있다.

[정재원 기자]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의 사임은 20일(현지시간) 이뤄졌지만 그의 사임은 이미 3주 전 금융시장이 트러스가 새로 발표한 감세정책에 반발해 영국 금융자산을 대거 매도할 때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분석했다. 

시장이 신속하게 트러스 총리의 감세 정책에 대한 평가를 내리면서 트러스의 신뢰도가 무너지고 영국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가 약해지면서 주택담보 금리가 치솟고 파운드화가 미 달러 수준으로 하락했으며 영란은행이 영국 채권 하락을 막기 위해 시장에 개입해야 했다. 

채권 금리와 환율이 초단위로 등락하는 것으로 나타난 시장의 거부가 각료들의 사임이나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보다 트러스의 사임에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경제 위기에 직면한 각국의 지도자들은 트러스의 사임을 반기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하고 있다. 영국 이외 다른 나라들의 연금 펀드도 영국에서 발생한 금융압박과 같은 압박을 받고 있다. 각국 지도자들은 자국에서도 트러스와 같은 고민을 하길 절대 원치 않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여름 트러스가 자신을 친구인지 적인지 분명히 밝히길 거부한 이후 최근 관계를 개선하면서 "영국이 하루빨리 안정을 되찾고 잘 지내길 바란다. 그게 우리에게도 유럽 전체에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트러스가 시장이 감세정책이 아닌 세계적 흐름에 좌우된다고 주장한 것은 맞다고 말한다. 각국 중앙은행들은 물가상승 완화를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있다. 

금융변동 전문가인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케네스 로고프는 "트러스가 모든 문제를 일으킨 것은 절대 아니지만 트러스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지금 당장 가장 큰 걱정은 국제 금리가 계속 오르고 조만간 안정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영국이 탄광의 카나리아 처지가 됐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트러스는 마거릿 대처 전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파괴자, 자유시장 전도사 이미지를 오래도록 구축해왔다. 그의 감세정책은 경제강국의 물가상승 대처로선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트러스는 "낮은 세금, 고성장" 비전을 추구하면서 정통 경제 정책이나 시장의 기대를 거스른 점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트러스는 일주일 전 자신의 부자 감세정책 일부를 폐기한 뒤 열린 보수당 연례 회의에서조차 "변화를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경제 성장과 보다 나은 미래의 혜택은 모두가 받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트러스의 결정적 실수는 물가가 두자리수로 오르고 금리가 상승하는 와중에 정부 지출 감축없이 대규모 감세정책으로 시장의 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라고 지적한다.

런던 킹스칼리지 경제학 및 공공정책 교수 조너선 포르테스는 "금리가 낮았던 2010년대에는 (감세정책이 가능하지만) 마냥 금리가 오를 때 부채를 늘리는 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잘못된 금융정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트러스와 해임된 재무장관 콰시 콰르텡이 관례를 깨고 예산담당관실의 검토를 받지 않은 채 대규모 감세정책을 발표함으로써 "제도를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행동 때문에 각종 스캔들 끝에 장관들이 줄이어 사퇴하자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전임자 보리스 존슨의 전철을 밟게됐다는 것이다. 

콰르텡 장관의 정책운영에 대해 시장은 정부가 제대로 된 금융정책을 펼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정부 부채가 720억 파운드(약 115조5,449억 원)이나 늘어날 것으로 본 것이다. 

케임브리지대에서 금융위기로 박사학위를 받은 콰르텡 장관은 금융시장의 반발을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했다. 트러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파괴를 통한 변화를 신봉했다. 두 사람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서 대처 방식의 자유시장 혁명을 뜻하는 "속박받지 않는 영국"을 신봉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영국인들이 "전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영국이 현재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지 아직 분명치 않다. 트러스의 사임이 발표된 20일 파운드화가 올랐고 영국 정부 채권 금리는 떨어졌다. 

정부가 예정했던 모든 감세정책이 사실상 폐기됐으며 다음 총리는 정부지출을 줄이는 엄격한 재정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됐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시절 내내 지속됐던 암울한 긴축정책이 재연될 것으로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포르테스 교수는 "리시 수낵 등이 시장을 진정시킬 수 있지만 보수당의 현 상태를 감안할 때 보수당 총리가 장기적 충격을 극복할 수 있을 지 예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리시 수낵은 재무장관 출신으로 트러스와 경선에서 맞서 최종 결선에서 패배한 사람이다.

영국이 입은 가장 큰 충격은 한때 견조했던 파운드화의 평판이 추락한 점이다. 경제학자들이 영국이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재정적으로 후진국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전 미 재무장관 로런스 서머스는 "이렇게 말해서 안됐지만 영국이 신흥시장에서 침체시장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본다"고 말했다. 

2009년 1조1,000억 달러(약 1,576조 원)의 구제금융을 받았던 영국으로선 치욕스러운 추락이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조너선 파월은 "내가 미국 펀드 매니저라면 영국을 과거와 같은 초우량 범주에 넣지 않을 것이다. 영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를 그 범주에 집어 넣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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