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대주주 일가의 경영권 분쟁을 계기로 대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정치 민주화는 '1인1표'를 기본 원리로 삼는다. 반면 자본주의의 핵심은 '1주(株)1표'다. 하지만 '1주(株)1표'는 그저 구호로 전락했다. 롯데그룹의 예에서 보듯 소수의 지배주주(controlling minority shareholder)가 순환출자를 통해 소액주주의 부(富)를 침탈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런 행태는 대기업, 나아가 시장경제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킬 수 있다. 대기업이 업그레이드를 통해 우리 경제에 이바지하라면 지배구조 개선은 필수 과제로 지적된다.

계열사 80곳·연 매출 83조원·임직원 국내외 18만명….

재계 서열 5위인 롯데그룹의 규모다. 이 그룹을 지배한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분은 0.05%, 총수일가 지분을 다 합쳐도 2.41%밖에 안 된다.

롯데그룹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을 계기로 소수 지분만으로 그룹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순환출자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9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국내 대기업집단(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순환출자 고리는 459개다. 이 가운데 롯데그룹의 순환출자 고리는 90.6%인 416개를 차지하고 있다.

순환출자란 한 그룹이 'A→B→C→A' 와 같은 방식으로 계열사들끼리 자본을 투자하는 것이다. A는 한 푼도 없이 B와 C를 지배할 수도 있다. A가 B, B가 C에게 100억원 출자하면 다시 C가 A에게 100억원 출자로 A는 100억원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금을 투입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가공자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롯데그룹의 순환출자 고리 수는 2013년 4월까지만 해도 9만5033개였다가 지난해 417개로 크게 줄었다. 올해 들어서는 416개 고작 1개 줄어들었을 뿐이다.

지난 2013년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되고 기존 출자에 대해 공시의무가 부과되자 롯데는 2년간 불과 12차례의 지분거래를 통해 고리 수를 크게 줄였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순환출자 고리만으로 그룹을 장악하고 있다. 총수 일가가 보유 지분이 많은 호텔롯데와 롯데쇼핑, 롯데알미늄, 롯데제과, 롯데칠성음료, 롯데상사, 롯데케미칼, 롯데건설 등 10여 개 핵심 계열사를 축으로 그룹사 전체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순환출자' 방식 동원

순환출자 형태는 단핵·다핵·단순 삼각구조 등 3가지 유형을 나눌 수 있다. 국내 대기업들은 다양한 형태의 순환출자 방식을 동원하고 있다.

단핵구조 순환출자 기업집단에서는 총수 일가가 많은 지분을 보유한 핵심 회사를 중심으로 순환출자 고리가 형성된다. 삼성은 제일모직(총수일가 46.0%), 롯데는 롯데쇼핑(28.6%), 현대산업개발은 현대산업개발(15.4%), 한진은 한진칼(10.0%) 등이 사실상 지주회사 기능을 수행해왔다.

다핵구조는 총수일가가 지분을 보유하는 다수 회사를 중심으로 순환출자 고리가 연결됐다. 대표적인 기업집단은 현대자동차와 현대, 현대백화점이다. 현대자동차는 현대자동차(총수일가 4.0%)와 현대모비스(7.0%), 현대는 현대엘리베이터(6.9%)와 현대글로벌(67.1%), 현대백화점은 현대백화점(19.7%)과 현대에이앤아이(52.0%) 등으로 순환출자고리가 형성됐다.

단순 삼각 구조는 총수일가가 핵심 회사에 출자하고 2개 계열사만 거쳐 다시 핵심 회사로 연결되는 식이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중공업(총수일가 10.2%), 금호아시아는 금호산업(10.4%), 대림은 대림코퍼레이션(93.8%), 한라는 한라(18.3%)에서 순환출자 고리가 시작된다.

◇총수 일가, 낮은 지분율로 그룹 전체 장악

삼성과 현대 등 대기업들은 순환출자 고리는 많이 해소됐지만, 총수일가가 낮은 지분율에도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총수일가에 대한 지분율 규제가 심화하면서 내부지분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그룹 지배력을 유지해오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4월 현재 롯데의 내부 지분율은 62.4%에 달한다. 내부 지분율은 전체 발행주식에서 총수 개인과 총수의 친인척, 계열사 임직원을 포함한 특수관계인 등 내부 관계자들이 보유한 지분의 비율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계열사 지분, 자사주와 자사주 펀드도 포함된다.

그동안 롯데를 비롯한 재벌그룹은 주로 계열사 간 지분을 교차 소유하는 등의 순환출자로 총수 중심의 지배구조 구축에 힘썼다.

SK는 최태원 회장의 지분이 전체 대비 0.04%에 불과하지만, 내부 지분율은 52.3%에 달한다. 삼성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지분율은 0.71%로 미미하지만, 내부 지분율 52.7%에 이른다.

현대자동차도 정몽구 회장의 지분율은 1.80%, 내부 지분율 51.5%였다. 삼성·현대·SK·LG·롯데 등 상위 10대 대기업 집단의 내부 지분율은 20년 전인 1996년 44.0%에서 지난 4월 현재 53.6%로 높아졌다.

◇대기업 총수 일가,순환출자 통해 지배력 강화

순환출자는 외국의 일부 기업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루이뷔통 등으로 유명한 명품 유통업체 프랑스 LVMH와 인도 최대기업 타타그룹, 일본 자동차 기업 도요타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순환출자 고리는 우리나라처럼 복잡하지 않다. 규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미국은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규정이 없지만, 우리와 같은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순환출자 기업 배당에 대한 이중과세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재벌이 해체된 일본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일은 이사회와 감사회를 둔 이원적 기업지배구조로 순환출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국내에서는 순환출자구조와 지배구조 개편을 통해 대기업 총수일가의 지배력이 크게 강화됐다.

SK그룹은 지난 6월 26일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SK C&C와 SK㈜ 합병의 건을 원안대로 승인했다. 이 합병으로 기존 '최태원 SK 회장→SK C&C→SK㈜→사업자회사'로 연결되던 복잡한 지배구조가 '최 회장→합병회사→자회사'로 간결해지면서 최태원 회장의 그룹 장악력은 한층 공고해졌다.

삼성 역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을 강화했다.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구조는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전기·삼성SDI→제일모직' 형태로 이뤄져 있었다. 제일모직이 삼성생명의 지분 19.3%를 보유하고 있고, 삼성물산은 삼성전자 지분 4.06%, 다시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 7.21%를 들고 있는 구조다.

이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 합병으로 '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로 지배구조를 단순화했다. 특히 이 부회장은 통합 삼성물산이 소유한 삼성전자 지분 4.1%를 통해 그룹의 핵심인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을 견고히 할 수 있게 됐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은 "순환출자가 재벌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며 "공정거래법 규제만으로 롯데 사태에 접근한다면 재벌 개혁의 실패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전자투표제·집중투표제·다중대표소송·집단소송 도입 등을 통한 소액주주 권리 강화, 기관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규정한 스튜어드십 코드의 제정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거버넌스 및 주주권리 강화 필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은 한국 기업의 취약한 지배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룹 총수의 '지시서'가 상법상 기업의 공식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 '의결'보다 우선시됐다. 계열사 사장단이 주주가 아닌 그룹 총수에게 '충성'을 집단적으로 맹세하는 시대착오적인 모습도 보여줬다.

이같은 상황이 이어지는 한 국내 대기업의 업그레이드는 기대할 수 없다. 이번 기회에 내부 지배구조 및 주주 권리를 강화해야 경영효율 및 기업가치 제고도 가능한 것으로 지적된다.

◇내부 지배구조(거버넌스) 강화해야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은 부친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작성한 '해임 지시서'를 토대로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그룹에서 축출됐다"고 주장했다.

신동빈 회장이 '법적인 효력은 없다'고 일축하긴 했지만, 롯데그룹의 경우 그동안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시서가 공식 의사기구인 이사회의 의결보다도 우선시된 것으로 평가됐다.

롯데그룹 계열사 사장들이 집단으로 신동빈 회장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것도 이사회를 통한 의사결정 구조를 무시한 사례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상법 등 관련 법령이 정한 절차보다 재벌 총수의 한마디가 더 우선시 되는 '손가락 경영'과 '충성 경쟁'은 롯데그룹뿐만 아니라 한국 대기업 그룹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재벌 총수는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지만, 법적 책임은 피해 갈 때가 많다. 관련 법률에 따르면 기업의 의사결정 책임은 이사회가 진다.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회사의 중요한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며 "주총에서 이사를 해임하고 이사회에서 대표를 뽑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사회를 총수가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어서 자의적인 지배가 가능하다"며 "이사회 구성에 있어 일반 주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집중 투표제를 강화하고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지배주주가 참여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소액주주 등 주주권리 강화해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신격호 총괄회장 일가가 보유한 롯데그룹 지분은 전체 2.41%(신격호 0.05%)에 불과하다. 4월 기준 459개에 달하는 순환출자로 형성한 가공자본으로 80개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지분을 보유한 주주들은 경영 참여가 배제됐다. 실제 소액주주들은 동빈-동주 형제간 갈등으로 롯데그룹의 기업가치가 급락하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다.

전문가들은 "영미권 국가처럼 주주의 경영 참여 권리가 보장됐다면 전근대적인 '형제의 난'은 일어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왜곡된 재벌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첫 단추로 주주 권리 강화를 꼽는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2013년 전자·서면투표제,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과 집단소송 등 주주 권리 강화를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만들었지만, 재벌들의 반발로 사실상 백지화된 상태다.

권오빈 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이번 분쟁은 그룹이 총수일가의 사유물이라는 전근대적 사고와 이를 뒷받침하는 불투명한 지배·소유구조 때문"이라며 "총수일가의 전행과 사익 편취를 막기 위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진방 교수는 "일반주주의 의견 반영이 보장돼야 한다"며 "상법이나 자본시장통합법으로 주식회사나 상장회사의 지배구조와 관련된 여러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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