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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네의 대사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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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05  10: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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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두 가지 기본 원칙.

첫 번째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

둘째는 모든 게 사소한 일이다.

 

   
▲ 유중원 변호사
김규현은 건축가로서, 사막 여행가로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리의 수도 바마코에서부터 니제르의 수도 니아메까지 노예의 강인 니제르 (또는 나이저) 강 유역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그 사원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나의 머릿속 지도에서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장 구석진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사원은 나의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야 할 마지막 건축물이었다. 내가 평생에 걸쳐 작성하고 수정한,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할 건축물들의 목록 중에서 마지막 건축물. 우아르자자테 유적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건축물.

젠네의 사원은 흙벽돌로 쌓아 올리고 사이에 진흙 모르타르를 발라 지어진 것이다. 하늘로 치솟은 첨탑과 함께 빛이 바랜 진홍색 벽면에는 야자나무 줄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촘촘하게 돌출해 있다. 그것은 장식적 효과라기보다는 큰 비가 내린 후에 수시로 하는 보수공사 시 발판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묘한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젠네의 대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큰 진흙 벽돌로 지은 건축물이다. 말리의 중세 도시인 젠네는 내륙도시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거대하고 우아한 사원은 니제르 강의 한 지류라고 할 수 있는 바니 강의 작은 섬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코아의 모스크는 말리 쪽 니제르 강의 푸른 수면 위로 가공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신전 안은 예전에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을 제단만 덩그러니 놓인 채 온통 텅 비어 있다. 무심한 세월과 텅 비어 있는 신전. 인간들이 그 신전을 스스로 차지하기 위해 거기서마저 신을 쫓아버렸던 것일까. 그래서 어두침침한 텅 빈 공간에서 공허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그곳에는 단순한 검소함이, 절제가 있고, 그리고 장엄한 침묵이 도사리고 있다. 그 공간은 초월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러므로 그 건물의 용도가 신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과시와 위협을 하기 위해서 쓸데없이 화려한 유럽의 성당과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대조적이었다.

 

말리 중남부의 나이저 강 유역 내륙 삼각주에서는 점과 무당이 성행하였다. 무당과 그들의 점괘는 말리 사람들의 삶에서 빠져서는 안 될 일종의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때 젠네에서 만난 도곤족 출신의 늙은 남자 점술가가 자기 종족의 조상신과 위대한 알라신이 함께 내려준 신통한 점괘를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도곤족의 창조 신화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하늘에 창조주 암마가 있었는데 암마는 진흙으로 알을 빚었고 이 무한한 공간에서 만물의 바탕이 되는 여덟 개 씨앗의 싹을 틔웠다. 이 싹에서 세상이 태어난 것이다. 그 다음에 암마는 사람과 동물의 형상을 반반씩 가진 놈모라는 대리인을 낳았는데 처음에는 남자 놈모 넷을 만들고 그 다음에는 여자 놈모 넷을 만들었다. 첫째 놈모는 하늘과 천둥과 비를 관장했고, 둘째 놈모는 심부름꾼이 되어 첫째를 도왔고, 셋째 놈모는 물을 다스렸고, 넷째 놈모인 유루구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갖지 못했다면서 창조주에게 반항을 했다. 그래서 암마는 그를 태초의 알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러나 유루구는 알의 한 조각을 훔쳐내어 그것으로 지구를 만들었고 지구에서 자신의 여자를 찾아내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지구는 메마른 불모의 땅이었으니, 그래서 유루구는 태초의 알로 돌아가 태반을 가지고 자기 아내가 될 여자, 야시구이를 만들었다. 그러자 몹시 화가 난 암마는 야시구이를 불로 변하게 했고 그리하여 태양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유루구는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이번에는 태양의 한 조각을 떼어서 지구로 가져온 다음 그것을 조각내서 씨앗을 만들었다. 그는 씨앗들이 싹을 틔우면 새로운 세상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마침내 자신의 짝을 얻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암마는 유루구의 숱한 도발을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여우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 놈모들 사이에 커다란 전쟁이 벌어졌고 그들은 앞 다투어 태초의 알에서 조각들을 떼어냈는데 그것들이 모두 밤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생겨난 수많은 파동들이 별들을 이곳저곳으로 움직이게 하였다.

 

돌과 어도비 벽돌로 지은 그의 집은 도곤족 마을에서 몇 그루 바오밥나무가 서있는 언덕을 지나서 가파른 절벽 꼭대기에 있었다. 도곤족들은 단층의 암석지대 절벽에 집을 짓고 독특하고 폐쇄적인 정체성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 길에는 딱새들이 황토층에 굴을 뚫어 둥지를 틀고 있었고 꿀새는 바오밥나무의 마른 가지로 날아올라 소리치고 날갯짓을 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 가려면 틈틈이 선인장과 가시덤불이 숭숭 자라고 있는 아주 험한 길을 올라가야만 했다.

바람이 일면서 흙먼지가 단조로운 회색 풍경을 연출하였다.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물을 못 마신지 몇 시간이나 지났고 지금 더위를 먹은 상태이다. 콧잔등에서 큰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자신은 아주 보잘 것 없고 언제부터인가 인생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존재라고 느꼈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과 추상적이고 순순한 공포심이 나를 짓누르고 있다.

그는 8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꼿꼿하였다. 차분한 풍채에서 원숙한 우아함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목에는 유리구슬이 달린 황동 목걸이를 달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일까, 아니면 부적일까, 신에게 바치는 어떤 상징적인 표식일 것인가? 신앙심이 깊은 이 이슬람교도는 온화하고 그윽한 눈을 들어 사람을 쳐다본다. 위엄 있고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코미디의 달인이자 광대이고 마법사이고 예언자인 그가 저음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프랑스어로 주문을 거는 듯한 낮은 음성으로 아주 느릿느릿 말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온 이유는? 그럼 원하는 게 뭔지를 말해보시지. 자신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게 있을 것 아닌가. 가족을 떠나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면…… 가진 돈 모두 털어서 그 먼 거리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면…….”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요. 막연한 갈망이거나 무의식적인 충동질일지 모르겠네요.”

“허튼소리. 당신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걱정이 많겠지. 건강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마누라하고는 심각한 문제가 있을 거야.”

“대단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어딘지 가고 싶어요. 아무 데도 아닌 곳에서 아무 데도 아닌 곳으로 말이지요. 아직 못 가본 곳이 수두룩하지요. 그러니까 암흑의 심장부에는 그 근처에도 못 가본 것이지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암흑의 대륙 깊은 곳을 말하는 거겠지. 통나무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늪지대를 거쳐 밀림 속으로 들어가는 거. 거기에 공룡은 없을 거라고…….”

“거길 왜 가려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니에요. 아니……. 그저 뭘 해야 할지 몰라요. 불안하고 혼란스럽거든요.”

“그러나, 당신 실수하는 거야.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에 불과해. 검은 숲에는 악귀가 살고 있거든. 그 악귀는 온몸에 수백 마리의 무서운 살모사와 코브라를 휘감고 있고, 거대한 왕도마뱀과 비단 구렁이, 체체파리 떼를 거느리고 있지. 그리고 그녀의 폐에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우굴 거리는데 숨을 내쉴 때마다 그걸 내뱉는 거야. 그나저나 심장부에 들어가기도 전에 피그미가 쏘는 독화살이나 밀렵꾼이 쏘는 칼라슈니코트 총탄…… 수류탄에…… 맞아 죽을 거야. 아니면 날이 넓고 무거운 칼인 마체테가 그대 몸을 난도질을 할 수도 있거든”

“그렇군요. 그래요.”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군. 산전수전 다 겪었거든. 그 참혹한 전쟁에도 끌려갔었지. 그 전쟁에서 알게 된 건데 백인들은 참으로 잔인한 악마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나도 죽고 나면 백인이 될 거야. 모든 죽은 자들의 혼령은 하얗거든.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신이 찾는 게 뭔지 알 것 같단 말이야. 인생의 비밀 같은 거, 또는 그곳에 신이 있는지를 알고 싶은 거야.”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 본론으로.”

“어쨌거나 아주 멀리서 왔구먼. 이 세상의 저쪽 끝에서 온 거야. 신도 동양인은 처음일 거야. 그렇지만, 신은 시리우스별에서 이 세상 끝까지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당신의 운명도 알 수가 있지. 신은 전지전능하시거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다시 말하자면…… 신은 땅과 하늘, 바다의 주인이시니, 동서고금을 통해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을 죄다 알고 계실 뿐더러 지금도 이 세상 구석구석에 일어나는 모든 걸 보시고, 모든 걸 듣고 계신단 말이지. 나는 이븐시나가 아니라 알가잘리를 숭배하거든. 이븐시나는 신, 당신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을 대충 매우 개괄적이고 관념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었지. 그러나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씀이지. 쿠란을 완전히 곡해하였으니까 결국 알라를 모욕하는 거지. 한 때 신앙의 위기를 겪다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가슴에 비추어주신 한 줄기 빛’ 덕분에 이를 극복한 알가잘리는 이를 반박했지, 이슬람이 인정하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평가하신다고 했거든.

그런데 신은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거야. 이게 당신의 이름인가. 신께 당신이 이 성소를 방문한 사실과 당신의 이름을 알려 드려야지. 신께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 그러나, 신은 전지전능하니까, 전지전능하다니까…… 당신의 이름만 알아도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무얼 알고 싶은지 다 알고 있으니까, 염려할 것은 하나도 없어.

여기는 인간의 더러운 손길이 닿지 않는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성소야. 여기에 있는 낡은 쿠란에 신의 성령이 강림하지. 조개껍질이나 호리병박, 야자나무 껍질이나 거북이 등껍질을 가지고 점을 치는 것은 완전히 미신이야. 해괴한 미신에 불과하지. 그런 것에 속을 건 없어. 당신만 바보가 되는 거야. 난 오직 신께 정성껏 기도하고 성령을 통해 신과 진지한 대화를 하지. 그러면 위대한 신께서 그의 비밀을 귀띔해 주는 거야. 알겠어?

그런데, 프랑스에는 왜 성직자보다 점성가가 더 많겠어. 너무 많은 돈을 주었어. 하지만 거절하진 않겠어. 신께서도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나도 마을에 내려가면 돈 쓸 일이 많아. 요즈음 극심한 가뭄 때문에 시달리고 있지. 모든 게 말라버렸어. 그랬으니 쌀값이 몇 배나 뛰었단 말이지.”

그는 몇 시간째 눈을 지그시 감고서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 입술을 달그락거리면서 이상한 주문을 외운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접신을 하면서 진지하게 신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무아지경에서 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오두막집의 어스름 속에서 그의 신성한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마침내 환희에 들떠서 몸을 부르르 떨더니 깊은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신이 은유적으로 넌지시 한 말을 알아들은 게 분명하였다.

“조용히, 조용히. 엄숙한 순간이야. 제발 집중해주게. 그래야만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신의 말씀엔 아무런 논리가 없어, 눈꼽 만큼의 논리도 없으니까 그냥 믿으라고. 믿음이 필요하지. 그런데 당신은 착한 사람이야. 참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지.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어. 그건 신께 물어볼 필요도 없어.

하지만, 당신은 여자도 없고 자식도 없어. 스스로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이지. 그래서 외로운 거야. 지금 지독한 외로움을 겪고 있는 거야. 평생 갈 상처를 안고 있으니, 그러다가 미쳐버릴지도 모르겠군.

문제는 당신이야. 그걸 신이 정확히 지적했어. 당신은 만날 여자한테서 도망만 다닌단 말이지. 예쁜 여자인지 못생긴 여자인지 가리지 않고. 여자 쪽에서 미쳤다고 도망가는 남자를 쫓아가겠어, 그건 애시 당초 도대체 기대하지도 마. 여자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사랑을 고백조차 못해서야 안 되겠지. 그건 세상을 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은 거야. 사랑처럼 위대한 것은 없는 거지. 그러니까 여자를 만나거든 겁먹지 말고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란 말이야. 그러면 진짜 좋은 배필이 찾아와서 당신에게 잘해 줄 거야. 아이도 열 명쯤 낳아주고 말이지. 신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당신 직업이 참으로 수상해. 허구한 날 길을 걷다가 지쳐서 쓰러지는 거야. 여기저기 길이 있는 곳마다 막 쏘다니고 있구먼. 그러니까, 도대체 큰돈을 벌 기회가 없는 거야. 그 원대한 꿈을 이룰 수도 없고. 그 병을 고치기가 난감해. 당신은 다리가 병나기 전에는 계속 걸을 테니까. 그건 신도 어쩔 수 없다고 하네. 이쯤에서 결론을 내려야겠지. 당신은 멀리서 온 사람이고 또 멀리 갈 사람이야. 그리고 길에서 외롭게 죽을 운명이야.

그대는 자신에게 너무 잔인한 거겠지. 스스로에게 얼마나 잔인해지고 싶은 거야. 자기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으니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거야. 인생에는 두 가지 기본 원칙이 있는 거라네. 첫 번째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마라, 둘째는 모든 게 사소한 일이다. 하나님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 하라’고 하셨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지혜인 거야.”

나는 어느 정도 신통한 점괘에 아연실색 하였다. 족집게처럼 맞췄다고 할까. 나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돈을 추가로 내밀면서 그 무당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영험한 부적을 신신당부하였다.

내가 말했다. “나의 적이나 불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날 보호해줄게 필요하지요. 나는 보호가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나에게 방향감각을 주고 인생의 목적을 밝혀주는 게 있어야 하지요.”

그러나 그 현자는 그 돈을 냉정하게 거절하였다. 그에게는 지금 어떤 부적도 효험을 발휘할 수 없으니 돈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야, 부적으로는. 그건 희생 재물을 바쳐도 소용없을 거야.”

푸른빛과 다양한 색채가 오묘하게 결합하여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프리카의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아득히 펼쳐져 있는 저지대의 황량한 황갈색 땅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나는 어느덧 무성하게 자란 검은 턱수염을 쓸었다. 그러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아득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는 존경받는 자이고 멸시받는 자이다. 그녀는 타락한 자이며 거룩한 자이다. 그녀는 아내이고 처녀이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딸이다…… 그녀는 지식이며 무지이다.

그녀는 압도적인 힘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영영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었어. 난 당신을 붙잡을 수 없었던 거지.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해줘. 날 내버려둬.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리고,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1998년 늦은 봄. 피부의 혈관이 터져서 피가 콸콸 흐르는 것처럼 하늘이 핏빛으로 붉어지던 토요일 늦은 오후.

황혼의 빛깔은 마치 무지개를 층층이 쌓아 놓은 것처럼 불타는 분홍, 장밋빛 분홍, 짙은 회색 분홍으로 변하고 있었다. 세상의 풍경이 황금빛 석양에 물들고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본다. 시뻘건 해가 석양 저편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 방배동 쪽으로 아주 느릿느릿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는 아프리카로 가는 출국 준비가 거의 끝나서 홀가분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6월 초순경 출발할 예정이었다.)

나는 그녀와 길에서 갑자기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깜짝 놀란다. 나는 손희승을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곧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녀가 새로 창간한 패션 전문 잡지의 사진기자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죄송해요.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그냥 그랬어요.”

두 사람은 짧은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환한 미소에 잠긴다. 서로 반가워서 손을 잡을 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주춤거렸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다. 나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녀에게 심술이 나서 빈정대고 싶었지만 꽉 막혀버린 목구멍에서 말이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가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골목길로 꺾어지는 모퉁이에 너무 빨리 도달했다. 거기서 잠깐 멈추었고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려고 하였지만 눈물이 글썽거려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뒷골목 길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그때 했던 말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참된 사랑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줄 알죠.”

사소한 작별 뒤에는 영원한 이별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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