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 가평 세계캠핑대회’주행사장인 자라섬 캠핑장 준공식에 참석한 장경우 한국캠핑캐라바닝 총재가 축사를 하고있는 모습
얼마 전 무심코 책 광고를 보는데 제목 하나가 내 눈길을 끌어잡았다.

〈내 마음 속의 그림〉미술평론가가 쓴 책이니 분명 미숙작품을 얘기하는 것일 터인데, 나는 엉뚱하게 내 기억 속의 한풍경을 떠올렸다.

시흥의 노란 들녘이었다. 지금까지 50년 동안 내 기억 속에서 가장 평화롭고 그래서 가장 그리운 풍경이 되어버린 곳!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풍경이 아직도 나는 금방이라도 그려낼 듯 선연하기만 하다.

 장면장댁 장손자

시흥군 수암면 하중리. 할아버지 댁이던 이곳은 어릴 적 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그 곳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발령이 잦은 아버지의 객지살림 탓도 있었지만 할아버지의 ‘장손자’사랑이 유별났던 게 더 큰 이유였다.

나를 낳기 전에도 부모님은 내 위로 누님 한 분과 형님 한 분을 보셨는데 웬일인지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 자식을 잃는 슬픔을 맛보셨다. 그 뒤에 나를 낳자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님 할머님까지 온 집안이 나서서 행여 어떻게 될새라 금지옥엽이 따로 없었는데, 아버님의 객지살림이 못 미더웠던 할아버지는 나를 극구 시골 집에서 맡아 키우셨던 것이다. 그만큼 내 유년으 기억의 대부분은 그 곳 화성 시골집의 추억으로 채워져 있다.

수암면은 대대로 우리 집안이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다. 16대조 할아버님은 이조의 4대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인 계곡(溪谷) 장유((張唯)어른으로, 따님이 효종의 왕비가 되면서 부원군을 지낸 바 있고, 인조반정 당시에는 공신에 천거되어 우의정을 지내면서 국가로부터 땅을 받았는데 바로 그 땅이 수암면 일대의 당이었다. ‘장군재’로 통하던 그 때으 땅이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유학자 집안의 후손답게 한학에 밝으셧고, 젊은 시절에는 수암면의 면장을 지낸 터여서, 동네에서 어른대접을 받으며 여전히 ‘장면장’으로 통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손자사랑이 워낙에 유별나신 터라, 덕분에 ‘장면장 댁 장손자’하면 웬만한 건 다 통하곤 했으니 수암면은 내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성격형성에 할아버지가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기가 죽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하시며 내가 말썽을 피워도 꾸중을 하시기에 앞서 내 자존심을 먼저 세워주시곤 했다. 그래서일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겪어온 어려운 삶의 고비마다 이상할 정도의 자신감 같은 것이 나를 지탱시켜 주곤 했는데, 바로 그런 뿌리가 형성 된 데에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나의 성격 형성에 그렇게 많은 영향을 주셨던 할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나를 아껴주셨건만 너무 어렸던 탓이었을까, 특별히 울고 했던 기억은 없다. 흡사 온 동네가 초상이 난 듯 대단한 울음바다가 몇날 며칠 동안 지속되었던 것 밖에는...... 아무리 어린 나이였다지만 그래도 그렇게 귀여워해 주시던 할아버지의 부재를 전혀 느끼질 못했으니 생각해 보면 여간 죄송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그 뒤로도 여전히 내 세상을 보장해 주는 할머니가 계셨던 탓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의 애정이 할아버지의 부재를 층분히 채우고도 남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굉장히 엄한 분이어서 어머니가 무척이나 무서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유독 나에게만은 어지 그리도 너그러우셨는지.

나중에 서울로 학교를 옮기고 난 후에도 나는 토요일만 되었다하면 책가방을 던져놓기가 바쁘게 할머니 댁을 찾아가곤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더 서울에서 시흥까지 한 번 가려면 꼼짝없이 하루 품을 팔아야 할 정도의 긴 거리였다. 먼저 인천 가는 기차를 타고 ‘소사’가지 간 다음 그 곳에서 다시 ‘소신여객’버스를 갈아타고 부천에서 신천리로 가는 고개를 넘어 수암면의 하중리에 도착하는데, 할머니 댁의 문 앞에 도착하면 언제나 어둑어둑해져 있지 마련이었다.

“아이고! 경우 왔나! 하룻밤 자고 갈꺼면서 뭐하러 또 왔나!” 손자 고생스러운 생각에 대뜸 나무라시기부터 하지만, 버선발로 뛰쳐나오시던 그 반가움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는 할머니는 사람 손을 시키지 않고 꼭 손수 밥상을 챙겨오시곤 하셨다. 할머니 앞에서 먹던 그 저녁밥이 어찌 그리도 꿀맛 같기만 하던지... 나는 지금껏 그렇게 맛있는 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소식을 듣고 그대로 서울역으로 내달려 기차를 타고 시흥까지 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길었다. 숨가쁘게 달려갔지만 할머니는 이미 운명하신 뒤였다.

하여튼 내 평생에 그렇게 울어 본 적이 다시 있을까 싶다. 나는 하늘이 무너진듯한 슬픔 속에서 정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왓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정을 집안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는데, 나는 그 어린 나인데도 거의 우격다짐으로 할머니의 염을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워낙에 깔끔하시고 꼬장꼬장하셨던 성격 탓인지 늘 ‘속앓이’를 하곤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병을 키우셨던 것 같다. ‘내 병은 내가 안다’하시면서 병원가자는 자식들의 청을 그렇게도 매몰차게 물리치시더니 결국 그 속앓이가 깊어지면서 말년에는 거의 못 잡수실 정도였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이제 갈 때가 되어 그러니 신경 쓸 것 없다’하시며 집 밖으로 나서질 않으시다 결국 운명하시고 만 것이다.

염을 할 때 눈물 속에서 보았던 바짝 마른 할머니의 몸이 그렇게도 안타까워 염을 마친 후에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이 솟아나는데, 울어도 울어도 무슨 눈물이 그렇게도 솟아나던지... 아무튼 나는 그 3일 동안 할머니의 곁은 떠날 줄을 모르고 집안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큰 슬픔으로 몸을 가누질 못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그렇게 깊은 정을 남기고 떠나셨다.

아침이면 경대를 펼쳐놓고 동백크림을 발라 곱게 머리를 빗어 올리고 조용히 문 밖으로 나서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모깃불을 피워 놓은 채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별을 세곤 했었는데... 그 많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할머니가 다 안고 가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요즘은 아무리 올려다 봐도 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옥수수밭의 사나이

수암면에서의 추억은 전쟁 와중에서도 온통 재미나고 즐거운 것으로 채워져 있다. 인천으로 가기 전까지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그 곳에 머물렀다. 그 시골에서야 인민군을 볼 수도 없었고 아이들은 그저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놀기에 바빴을 뿐이다.

신기한 것은 동네 부근에서 한 번도 총격전이 벌어지거나 사람이 죽거나 한 걸 본 적이 없는데도 야산에 올라가면 실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한웅큼씩 주어다 엿을 바꿔먹곤 했다. 새 것을 갖다 주면 파출소에서 뭐라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제는 그것을 일부러 못을 대고 터뜨려서 가져갔는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실탄을 분해하면 그 속에 연필심 같은 모양의 화약이 나오는데 그것을 잘게 부숴 탄약가루를 만들었다. 총알 하나를 분해하면 꽤나 많은 탄약가루가 나오곤 했다. 탄약가를를 제일 탐하는 것은 동네 청년들이었다. 이유는 그걸 막걸리에 타 먹기 위해서였다. 탄약가루를 넣으면 술이 더 독해진다는 것이었다.

정말 탄약각루를 막걸리에 섞으면 술이 더 독해지는지 나로선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몸에 좋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동네 형님들은 우리들을 시켜 탄약가루를 모아오게 해서는 무슨 귀한 약이라도 되는 양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술자리에서마다 터서 마시곤 했다.

막내삼촌은 동네 형님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서울공대를ㄹ 다니던 삼촌은 우리와ㅏ 함께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함께 시골로 내려와 있었는데, 삼촌 역시 인민군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삼촌을 볼 수 있었던 곳은 다름 아닌 옥수수 밭이었다.

그 때, 아무리 조용한 시골이라 해도 전쟁은 전쟁인지라 하루에도 몇 번씩 쌩쌩거리며 비행기가 지나가곤 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일제히 들판을 달리며 비행기를 쫓곤 했다. 당시 그 들판에는 옥수수 밭이 꽤나 크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옥수수 밭은 달려가다 보면 문득 삼촌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삼촌은 볼 때마다 영어 사전을 들고 있었다. 나는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며 어느 새 비행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삼촌 옆에 앉아 묻기 시작한다.

‘삼촌은 맨날 왜 여기에 있어?“

“삼촌은 맨날 꼬부랑 글씨 공부를 왜 하는데?”

내 질문이라는 게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삼촌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나중에 다 써먹을 때가 와!”

그러나 삼촌이 옥수수밭에 숨어서 그렇게 외어대던 ‘꼬부랑 글씨’를 다 써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옥수수밭을 피난처 삼아 숨어 있곤 했던 삼촌은 전쟁 중에 끝내 납북되었고, 지금껏 생사를 알 수 없다. 집안에서는 그저 어림잡아 제사를 지내며 돌아가신 걸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어릴 적부터 영민한 탓에 동네에서 인재났다며 꽤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삼촌은 그렇게 그 많던 ‘꼬부랑 글씨’를 다 써먹지도 못한 채 전쟁 중에 사라져갔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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