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정국'여야가 어렵게 합의한 9월 2~3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자유한국당은 조 후보자의 부인과 자녀 어머니 등 직계가족까지 증인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더불어민주당은 ‘망신 주기, 흠집 내기를 노린 가족 청문회’는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막판까지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한국당은 애초 요구한 조 후보자 가족 중에서 딸만 뺀 나머지를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그러면서 청문회 일정을 연기해서라도 가족을 반드시 증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장관 청문회를 전례없이 이틀간 하고
이총재의 백의종군 - 민주당은 어디로?3일 후 이기택 총재는 서울로 올라왔다.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해보니 생각보다는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놀러가도 좋습니까?" 라는 말에 이기택 총재는 선선히 오라고 했다. 막상 만나보니 얼굴도 생각만큼 많이 상해 있는 것 같진 않았다."이제 정치 마감해야지!""… 그래도 어떻게 소생 방법을 찾아 봐야지요… 다 늙은이도 아닌데 그 나이에 안방에서 쉬실 겁니까?""아냐! 이틀 정도 후에 백의종군 선언할까 하는데… 강창성 부총재랑 당신이 당을 잘 꾸려
동경의 밀사 회담약속은 쉽게 이뤄졌다. 동경의 한 호텔에서 만나자 박태준 씨는 정말 반가워했다. 나로선 박태준 씨의 본의 아닌 외유에 제대로 한번 인사도 못했는데, 정작 이기택 총재의 문제 때문에 밀사로 파견된 꼴이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우리는 한참 동안 옛날 민정당 얘기며 민자당 내에서 민정계의 구심점을 찾고자 노력했던 얘기 등을 나눴다."…사실 제가 오늘 온 것은… 박회장님이 꼭 포항에서 나가시겠다면 민주당의 당적을 가지고 나가실 수는 없겠는지요… 사실 이기택 씨가 이번에 나가려고 하는
개혁의 좌절된 꿈결과는 참패였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지역구 당선은 겨우 9명이었다. 여기에 전국구를 합쳐도 겨우 15명에 불과했다. 중견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버렸고, 그나마 겨우 남아 있던 15명의 의원 중 나중에는 3명이 신한국당으로 가버리고, 거기에 다시 장을병 씨까지 떨어져 나가자 이제 남은 것은 겨우 11명. 민주당은 국회 교섭단체도 안되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나 역시 낙선의 고배를 마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 선거구인 안산은 중앙정치의 무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그림에는 부감법(俯瞰法)이라는게 있다. 높다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말하는데 그만큼 넓게 보이고 총체적으로 보인다. 만역 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제나 부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 분호하거나 슬퍼하거나 할 일은 적어질 것이다.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런 사연 하나하나가 얼마나 부질없고 허무한 일이라는 걸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이 어지 쉬운 일이라. 우리들은 아직도 이 '아래'에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며 작은 일에도 목슴 걸 듯 매달려도 보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위리의
내 평생 최고의 연설 하나 남기고 얻은 마지막 영광그 때 나는 내 평생에 최고로 멋진 연설 하나를 남겼다. 물론 이것은 우리 참모들이 나에게 들려준 얘기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날 연설은 참 가슴으로 했던 연설이었다. 고양에서의 합동연설회 이후의 일이다. 분당의 중앙 공원에서 시장후보와 나를 위한 정당연설회가 있었다.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여기 저기 돌고 돌아 겨우겨우 시간에 맞춰 도착을 했다. 멀리서 봐도 사람이 꽉 차 있었다. 휴일이었고 날씨가 더웠던 탓에 공원에 놀러 나온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청중이 되고 있었는데, 특
상처뿐인 영광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 나는 국회에 앉아서 오랜만에 참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둘이 얘기가 잘 될 것이고, 나는 어떻든 그 결과에 따르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경기도지사 출마는 거의 체념상태였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 당내의 영향력이나 이런 걸 놓고 볼 때 이총재가 김 총재의 뜻을 거부하기는 상당히 힘든 상태였다. 게다가 수많은 소문에도 불구하고 김 총재는 은퇴를 할 상황이기 때문에 이 총재는 나름대로 대권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그런데 어차피 전당대회를 통해 디선후보 지명을 받으려면 대주주인 김대중 씨의 지원을
DJ와의 어색한 만남그 며칠 후 당시 내 비서관이었던 김재익 씨의 서울 행정대학원의 동문이었던 이강래 비서실 차장이 나를 찾았다. 그리고 다시 김대중 총재의 비서를 했던 남궁진 의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의원은 내 고교동창이었다."이 문제로 우리가 무슨 원수될 것도 아니고… 자네가 김총재 좀 만나보지?""내가 못 만날 이유가 뭐가 있겠나!"마침내 서교호텔에서의 조찬 약속이 잡혔다. 경기도지부가 주최한 경선대회일로부터 무려 1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사실 나는 입당 후에 김대중 총재 부부와 함께 노래방가지 가며 참
투표함을 호송하라!그 때 대의원 사이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야, 지부장 뭐하는 거야? 빨리 방맹이 두드리고 개표히야할 것 아냐!"당시 경기도 지부장은 이규택 의원이었다. 그 고함 소리에 이규택 의원이 막 단상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드디어 그 우명한 난동사건이 터졌다. 우루루 달려나오더니 지부장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하는데…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없엇다. 이규택 의원은 아예 와이셔츠가 다 찢어진 상태에서 넥타이가 붙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부총재로 있던 지도부의 모 의원은 아예 그 앞에 나
휴식시간의 그 사건제 2차 투표를 앞두고 다시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약 3,40분간 강당을 돌면서 인사하고 다니는 것이 전부인 짧은 선거운동이다. 얼마 후 갑자기 3번째의 후보였던 정관희 씨가 단당으로 뛰어 올라갔다."나는 안동선 후보를 지지하기로 하고 여기에서 사퇴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강당 안이 술렁술렁 했다. 사실 그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불법이든 뭐든 상황이 그렇게되자 나는 암담해졌다. 당내 지도부도 다 그 쪽으로 간 마당인데 이제 한 명의 후보까지 안동선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를 해버렸으니…"아, 내가 야
이종찬의 '밀사'와 출마선언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종찬 의원의 보좌관인 최상주 씨가 찾아왔다."두 분께서 만나면 또 말이 많이 날 것 같다고 하시면서 보냈습니다.""그래요? 무슨일이에요?""장의원님이 빨리 출마선언을 공식화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씀드리면 무슨 말씀이신지 알거라고 …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나는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어제 오후 3시에 김대중 이사장을 만난다고 했는데, 아마 이종찬 씨의 성격상 면전에서는 거절을 못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내가 아예 출마선언을 해 버리면
이기택 총재의 뜻밖의 제의어느 날 이기택 총재가 나를 불렀다.“장의원! 이번 지자제 선거가 중요한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소? 그 중에서도 서울과 경기도에서 만큼은 꼭 우리가 이겨야 할텐데 말이요. 현대 경기도지사의 경우는 안동선 씨가 강하게 원하고 있는데…내가 볼 때는 말이요, 이 사람으로는 여당을 꺾기가 힘들 것 같다 이거란 말이오. 현재 국민들 사이에는 반YS감정이 고개를 들고 있는데…어때요? 장의원! 당신이야말로 YS와 싸우고 나온 사람 아니요? 여야 경험도 풍부하고, 또 반YS라는 선명성도 있고&
그런 저런 일을 겪으며, 나는 오랫동안 ‘무소속’의 설움(?)을 겪었던 터라 오랜만에 맛보는 당원으로서의 푸근함이 참 좋았다. 특히 어디를 가나, 뭐가 되었든, 일단 열심히 뛰어야 비로소 사는 것 같은 내 성격에 참으로 오랜만에 국회 의 상임위원장으로 할 ‘일’이 쏟아져 오니 그 또한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이었다.무엇보다 한평생 야당을 하면서 잔뼈가 굵어온 당의 선배들과 동료들이 풍기는 이른바 ‘야당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끼며 하나하나 배워가는 재미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그러나 그런 만족감에 빠져 있는 것도 잠시
외로운 무소속과 수많은 동상이몽들대선이 끝나고 1년 6개월 동안, 나는 가장 외롭고 고달픈 의정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민자당 내 경선과정에서부터 후보 사퇴, 탈당, 창당, 새 후보 추대, 다시 사퇴...의 과정을 겪으며 나는 거의 탈진상태에 접어들었고, 게다가 새한국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교섭단체 구성도 안되다 보니, 국회가 개원되어도 본회의에서 발언기회는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그러다보니 지지 세력도 약해지면서 의정 활동에 활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이종찬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선이 끝난 직후 이종찬 씨는
이종찬의 두 번째 백기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면 될수록 기다렸다는 듯이 ‘유혹’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봉두완 씨와 김동길 씨 등은 아주 적극적으로 계속 ‘합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내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작 가장 먼저 접촉을 해온 쪽은 김대중 씨의 민주당이었다.당시 민주당의 강창성 씨는 중앙정보부 차장 시절 이종찬 씨가 보좌관을 했던 인연이 있었는데, 후보 등록 직후에 이종찬 씨를 만나 ‘함께 하자’는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이종찬 씨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계속 언론에 이 말이 돌기 시작
과 지금 집권당의 이름은 고 또 한나라당의 전신은 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이 이름들이 탄생되기 훨씬 전이었던 6년 전, 내 주변에서 생겨나고 무너졌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당시 이종찬 씨는 탈당 후에 이라는 정치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탈당 후 우리가 만들었던 이름이 이었다. 당시 우리는 신한국당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새한국당으로 할 것인지 오래 토론한 후, 그래도 한국로 하자며 이라는 당명을 정했다.그런데 그로
무당은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 위해 능력 써야“남편과 헤어지고 신병을 앓는 등 갖은 어려움을 다 겼었던 신딸은 내림굿을 받고 난 뒤부터 곧잘 맞히고 있어요. 아직은 동자 신 밖에 맞아들이지 않아서 비교적 작은 문제에 영험하지만, 3년쯤 수련하면 ‘신의 길’이 보다 넓게 보일거라며 정진하라고 일러줬습니다.”이른바 내림굿을 치르며 ‘신장개업’을 한 무당의 신통력이 뛰어나다는 통설은 실제로 그럴까, 과장된 얘기에 불과할까.심진송은 신을 막 받으면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과 영험한 힘이 남달리 강해진다고 설명했다.“자기 PR시
YS의 직감그런데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것일까? 바로 그 때 김영삼 씨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다. 이미 노태우 대통령이 탈당을 하고 김영삼 씨가 총재로 취임한 후였다.“내일 아침 조찬이나 같이 합시다!”순간 ‘아차’싶었다. 그렇게 극비리에 탈당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걸려온 전화였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이미 알고 있단 말인가? 만약 알고 있다면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을까?’일단 나는 약속장소인 하이얏트 호텔로 나갔다. 단 둘이 앉았다. 그리고 막 앉자마자 김영삼 씨의 첫마디가 나왔다.“장의원은 도대체 이종찬 씨와 무슨 관계입니까?
긴 방황! 짧은 선택!과연 ‘팔자’라는 게 있는 걸까? 정말 그런 것이 있어서 ‘장경우 너는 야당 할 사람이다’는 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웃자고 해 보는 소리다.어떻든 나는 끝내 야당 정치인이 되었다. 92년 대선을 거치면서 야당이 되었고, 또 07년 대선을 거치면서 그 우여곡절을 다 겪다겨우 1 달여 잠깐 여당에 앉아보았으나 그 역시 다시 야당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나의 얘기는 92년의 그 소용돌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내가 한 발 한발 밟아 옮겼던 그 92년의 여름과 가을과 겨울까지의 얘기를, 그리고 끝내는
어려움 닥칠 땐 기도하는 마음으로 극복해야경기도 부천시에서 예비군훈련장을 지나 시흥시로 접어들면 나오는 시흥시 대아동에 있는 심진송의 신당에는 날마다 점을 보러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심진송은 김일성의 죽음을 미리 예측했던 것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면서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매스컴의 각광을 받기 전부터 그녀는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손님들로부터 ‘영험’하다는 소리를 들어왔었다.그러나 ‘김일성 사망 적중파’에 끼여 ‘유쾌한 청문회’란 TV 프로그램의 역술인편‘에 출연하는 한편 ’한국인의 점술가‘에도 소개되면서 전국에서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