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운데가 장경유 전의원
긴 방황! 짧은 선택!

과연 ‘팔자’라는 게 있는 걸까? 정말 그런 것이 있어서 ‘장경우 너는 야당 할 사람이다’는 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웃자고 해 보는 소리다.

어떻든 나는 끝내 야당 정치인이 되었다. 92년 대선을 거치면서 야당이 되었고, 또 07년 대선을 거치면서 그 우여곡절을 다 겪다

겨우 1 달여 잠깐 여당에 앉아보았으나 그 역시 다시 야당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 나의 얘기는 92년의 그 소용돌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내가 한 발 한발 밟아 옮겼던 그 92년의 여름과 가을과 겨울까지의 얘기를, 그리고 끝내는 제 1 야당에 입당하기까지의 얘기를 나는 아직 더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저 사건, 경기도지사 ‘사태’에 이를 것이 아닌가!

돌아온 탕아?

당으로 복귀하는 것 역시 이종찬씨가 내린 결정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광화문의 경선캠프를 치울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허탈감과 싸우면서도 ‘뭔가 방법을 찾아야 되지 않느냐’며 나름대로 궁리에 궁리를 하고 있었다. 궁리라고 해봤자 결론은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탈당과 창당, 그리고 후보 추대, 대선 참여! 기자들 앞에서야 뭐라 딴전을 피운다 해도 솔직히 탁 까놓고 말해서,

그런 결론은 이미 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정치적 판세읽기와 시기 조정 등이 그 때의 궁리라면 궁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름 모처럼의 망중한을 보내다 그 유명한 광화문 골목의 옛날 짜장을 먹고 본부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이종찬 씨는 잠시 다른 곳에 들렀다가 돌아온다고 해서 박범진 의원과 김현욱 의원, 오유방 의원 등과 함께 캠프에 들어왔을 때였다.

기자들이 광화문 캠프로 몰려와 있었다. 김영삼 씨가 그 곳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우리는 정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한 기자가 말했다.

“어제 저녁 이종찬 씨와 김영삼 씨가 단둘이 만났다고 하던데…”

정말 어이가 없었다. 바로 이종찬 씨를 찾아 마주 앉았다.

“김영삼 씨가 이 곳에 온다고 하는데 알고 있었습니까?”

“…”

“아니…아무 말도 안하면 어떡합니까? 기자들 얘기로는 어제 힐튼호텔에서 만났다고 하고, 거기서 무슨 합의가 되어 위로 방문 차 온다는 것인데 사실입니까?”

“솔직히 고백하리다. 어제 김우중이가 보자고 해서 서슴지 않고 나갔더니 그 자리에 김영삼 씨가 나와 있더라구.”

상황은 뻔했다. 김우중 씨와 이종찬 씨의 교우관계를 잘 알고 있던 김영삼 씨는 김우중 씨의 측근을 통해 ‘당이 깨져서는 안된다. 김우중 회장이 총대를 매달라’며 부탁을 했던 것이고, 김우중 씨는 이에 응해 두 사람을 동ㅇ시에 불러 해우를 주선했던 것이다.

대놓고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이종찬 씨의 성격을 놓고 볼 때 그 자리에서 김영삼 씨의 정치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 자리에서 이종찬 씨는 일단 당으로 복귀를 하되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바로 당내 비주류의 계보활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합의가 이루어진 끝에 바야흐로 김영삼 씨의 광화문 캠프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과연 어마어마한 기자군단을 이끌고 김영삼 씨가 경선 캠프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는 터지는 후레쉬들. 별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얘기가 다 되었다. 내일부터 이곳에 계신 분들 다 당에 나오실 것이다’ 등의 말만 하고는 말 그대로 바람처럼 왔다가 텔레비전 모양만 갖추고는 바람처럼 철수해 버린 것이다.

당사자가 그러겠다는데 우리가 별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우리는 그렇게 다시 당으로 복귀를 했다.

막상 당으로 돌아가자 탈당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백기 들고 돌아온 형국이었다. 말 그대로 돌아온 탕아라고나 할까?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종찬 캠프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의원 중 몇은 오히려 더 친 YS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박모 의원 같은 경우는 나중에 비서실장까지 지내게 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당장은 ‘악발이’라는 소문까지 날 정도로 맹공을 퍼붓던 입장이었고, 무엇보다 이종찬 씨와 개인적인 의리랄까, 뭐 그런 것도 당시 나에겐 상당히 중요했고, 설령 이 모든 것이 아니었다, 해도 내 성격적으로 그럴 성격도 못되었다.

그러자니 당에 미운오리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눈만 마주쳐도 요즘 아이들 유행어대로 왠 ‘썰렁!’해지는 나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007작전을 방불케 한 탈당 작업

내가 그 정도였으니 이종찬 씨의 경우야 오죽했으랴. 결국 견디다 견디다 못해 8월에 이종찬 씨는 탈당선언을 했다. 이미 상당히 많은 민정계가 다 친YS로 돌아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결코 어떤 대책이 있는 탈당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못견뎌서 나가는 탈당이었다.

그러자니 또 무턱대고 따라나서는 것 또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자니 또 무턱대고 따라나서는 것 또한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종찬 씨도 남에게 뭘 요구하거나 괴롭히는 성격이 못되는지라 (결구 그것이 경선과정에서 봤듯이 가끔은 이종찬 씨의 한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떻든 우리에게 ‘가자 말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저 당사자들의 정치적 판단에 따를 뿐이었다.

당시 내 생각은 따로 있었다. 지금 이렇게 나가봤자 정말 말 그대로 못 견뎌서 나가는 것이고 막상 나가놓고 보면 뭔가 대책을 마련하는 일도 그만큼 어려워 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당내에서 좀 더 힘을 모아야만 하고 그때 탈당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 나는 흔히 <8인방>으로 불리는 의원들과 함께 자그마한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13대 말부터 꾸려오던 모임이었는데 무슨 계파 모임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는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그 때 함께 했던 사람이 이종찬, 심명보, 이태섭, 이치호, 김현욱, 오유방, 신상식 씨 등이었다.

이종찬 씨가 나가고 난 후,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우리들은 더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박태준 씨를 정점으로 채문식 씨와 윤길중 씨등의 원로들과 이자헌, 김용환, 박철언 씨 등의 중진들이 포함되는 만남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오유방, 김현욱, 이진우 의원 등과 함께 북한산 등반을 주 3회 정도는 했던 것 같다. 어떤 날은 오유방 의원과 한밤중에 등산을 하기도 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신문지에 촛불을 켜들고 산에 오르자면 정말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우리들의 처지가 새삼 새삼 무겁게 느껴지곤 했다.

게다가 이종찬 씨가 당으로 복귀하면서 김영삼 씨로부터 약속 받았다는 ‘당내 계파 활동 허용’은 당에 복귀하는 순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내가 막상 당에 들어와서 느낀 방에 의하면 계파활동 허용은커녕,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한 오히려 발붙이고 살아남기도 힘들지 않나 하는 점이었다.

그러던 중 9월초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드디어 박태준 씨의 성북동 별장(포철의 외국인 접대 장소)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는 ‘더 이산 이대로는 안된다’는 우리들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 모임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김영삼 씨는 안된다.”

“길은 탈당밖에 없다. 새 정당을 꾸리고 국민후보를 영입해야만 한다.”

이미 우리는 김영삼 씨에 대해서 야당 당수로는 최고일지 몰라도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던 터였기에 그만큼 결론은 빨리 났다.

그 때부터 숨돌림 틈도 없이 사람을 모으는 일에 들어갔다. 이자헌, 김용환, 박철언 씨와 내가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들의 의견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34,5명의 의원들이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만남들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심지어는 도청까지도 염려해 가며 모임들을 갖다보니 말 그대로 007작전이 따로 없었다. 그 누구도 눈치를 못 챘다고 장담을 할 수 있었고, 내 아내와 지구당 사무장 정도가 어렴풋하게 직감을 하고 ‘혹시’하면서 내개 말문을 열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 때의 한 달여간이 나에게는 정말 피를 말리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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