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그림에는 부감법(俯瞰法)이라는게 있다. 높다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을 말하는데 그만큼 넓게 보이고 총체적으로 보인다. 만역 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제나 부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 분호하거나 슬퍼하거나 할 일은 적어질 것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런 사연 하나하나가 얼마나 부질없고 허무한 일이라는 걸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이 어지 쉬운 일이라. 우리들은 아직도 이 '아래'에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며 작은 일에도 목슴 걸 듯 매달려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위리의 '현재'이다. 그 현실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면 이제 거기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돌파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의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면 '그 때 왜 그렇게 그 문제에 매달렸던 것일까?' 후회되고 부끄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참으로 진지했고 열심히 했다는 것만은 자신 할 수 있다. 이런 나의 삶을 어떤 도사(道士)가 있어 저 위에서 부감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할 지… 그러나 도사되기는 영 그른 모양인지 나는 아직도 이 '아래'에 있고 싶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김대중 씨의 '국민회의'가 민주당을 깨고 나가자 말 그래도 민주당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요'가 되고 말았다.

호남출신 의원들은 물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국민회의로 떨어져 나갔다. 그때 남은 사람들은 두 계열이었다. 먼저 개혁세력이라 자처했던 이부영, 제정구 박계동, 유인태, 김원웅, 홍기운, 박석무, 노무현, 원혜영 의원 등이 있었고, 이기택 씨 계열이라 할 수 있는 강창성, 이규택, 정기호, 박일, 이장희, 강수림, 양문희 의원 등이었다.

나는 사실 따져놓고 보면 특정한 계열도 아닌데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이기택 계열이 되었다. 그런데 또 몇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떻든 민주당에는 약 30여명 정도의 현역 의원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반토막난 것까지는 그래도 좋은데 이제 다시 또 남아있는 두 계열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김원기, 이부영, 제정구, 김정길 씨 등 개혁파들이 중심이 된 '구당파'가 나온 것이다.

'김대중 씨가 그렇게 나간 것에는 이기택 씨의 책임도 일정하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정황으로 놓고 보아 나름대로 명분과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남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다시 분열상을 보이니 밖에서 볼 때는 꽤나 한심하게도 보였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경기도지사 선거 이후 몸도 마음도 다 지쳐 있었다. 당은 그런 저런 일로 몇날 며칠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어디에서 마음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정치행정학과에 입학신청을 냈다. 무엇보다 좀 쉬고 싶었고, 또 공부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어렵지 않게 허가가 나왔다. 잘됐다 싶어 미국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깨진 조각 이어 붙이기

미국행 준비 때문에 바쁜 와중에 하루는 이기택 총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내 계획에 이기택 씨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정치란 현장을 떠나면 안되는 법이야. 외국 가는 건 취소하는 게 어떻소?"

그러자 강창성 씨와 이장희 씨도 거들고 나왔다.

"지금 떠나면 당 분열에 대한 책임이 다 우리에게 떨어지는데… 당이라도 제대로 추스러지면 나가도록 하세요, 몇 남지도 않은 사람이라도 힘을 모아야지 어떡합니까. 어떻든 지금은 안돼요."

결국 나는 또 그 논리에 붙잡혔다. 모든 일정을 다 취소하고 그 날부터 당수습에 앞장서야 했다. 구당파 측의 노무현 씨와 유인태 씨, 우리 측의 나와 강창성 씨 등 네 사람이 매일 만나다시피 하면서 '일당 당을 살리자'는 데까지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먼저 홍영기 씨와 박일 씨를 동동대표로 한 과도체제를 만들면서, 붕괴 직전까지 가 있던 민주당은 겨우겨우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얼마 후에는 또 새로운 당이 창당되었다. 바로 '개혁신당'이다. 민변의 회장이었던 홍성우 씨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장을병 씨가 주축이 되어 경실련의 서경식 씨, 재야 운동가 장기표 씨 등이 정치개혁을 부르짖으며 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 정치의 오랜 고질병인 '지역주의'와 '양김 정치'를 벗어나는 대의에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내가 민자당을 탈당하고 나올 때도 바로 그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고 나온 것이고, 또 경기도지사 선거를 치르며 양김정치의 폭력성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내 의지와 부합해 당에서는 또 나를 통합의 협상자로 내 보냈다. 하여튼 어디를 가니 어쩔 수 없는 내 운명이다.

당시 이 통합운동에 사람들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소위 말해서 '그 까다로운 운동권들과 잘 되겠어?' 하는 식인데, 나는 이상할 정도로 그런 선입견은 갖지 않았다. 지역주의와 양김정치의 고질적인 병을 극복하자는 대의에 함께 하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새로운 정치의 실험 무대

그로부터 다양한 실험들이 시작되었다. 이름은 여전히 '민주당'이었지만 우리는 당헌 당규 등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를 구현해 나갔다.

가장 먼저 시도된 것은 대통령 예비선거제의 도입이었다. 미국의 예비선거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는데, 국민이 직접 그 당의 후보를 뽑을 수 있는 대통령 경선제를 당헌에 아예 목 박은 것이다.

이것에 내가 열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야말로 경선을 통해 가장 많은 상처를 입었고 그만큼 그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탈당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던 민자당의 위장 자유경선, 그리고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지고만 민주당의 경선과정을 그 한가운데서 직접 겪으며 또 그만큼 상처를 받았던 나였던 것이다.

사실 경선이야말로 민주주의 꽃이고 민주적인 정당 조직의 기본인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경선은 마치 분열을 조장하는 제도처럼 되어버렸다. 모든 정치인들은 경선이 시작되면 각 후보의 정책을 비교 분석하기보다는 줄서기에 바쁘고, 또 아예 경선결과를 부정하고 뛰쳐나가는 상식 밖의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일각에서는 다시 경선이 없는 후보선출로 복귀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회귀한다는 것은 더 퇴보라고 본다.

아무리 폐단이 많아도 옳은 것은 지켜가면서 고쳐나가야만 한다. 중심이 흔들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는 그 대안이 예비선거제의 도입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이 직접 당의 후보를 뽑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만이 철저한 자유경선을 보장할 수 있고,

또 이것만이 우리 정치의 고질병인 일인 보스체제의 한계를 벗어나 정당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취지로 당헌에 예비선거제 도입을 명시한 후 바로 여론 조성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등 4당이 참여한 가운데 '예비선거제에 대한 대토론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각 당은 우리의 의견에 찬성은 하면서도 역시 일인정치에 휘말려 있는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우리가 새로운 정치를 열어가지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 드디어 1996년 4월 11일, 총선이 다가왔다. 바야흐로 우리의 새로운 정치이념이 국민들로부터 평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다가 온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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