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량리 여인숙
[신소희 기자]“창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 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움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 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 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른다// 그 여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로/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밀물여인숙3 전문)

19년 전 시인 최갑수는 이 한편의 시로 그해 문예지 ‘문학동네’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시 속의 ‘여인숙’은 가난하고 외로운 사내와 여인이 만나 헐거운 마음을 서로 부빌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이다. 여인숙은 삶에 지친 사람들이 큰 부담 없이 두 다리 쭉 펴고 누울 수 있는 곳으로 서민들의 기억에 아직 남아있다.

◇ 한국전쟁의 끝자락에서 생겨나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청량리역에서 경동시장 쪽으로 가다보면 소위 ‘청량리588’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홍등가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청량리여인숙촌’은 청량리588로 이어지는 한 골목길에 위치해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 같은 낡은 여인숙 간판과 수령 40~50년은 족히 될 듯한 감나무 한 그루가 이 골목의 내력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해인 1953년, 역전을 드나드는 여행객들을 손님삼아 이곳에 하나둘씩 모여든 여인숙들은 70년대 한때 40여 개소가 성업했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홍등가가 생기면서 업주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당시 업소주인들은 하나같이 60을 훌쩍 넘은 노인들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20~40년 동안 ‘잠자리 장사’를 했다. 이들은 도심재개발사업에 밀려 2010년까지 정든 이곳을 떠나야 한다.

여인숙에서 하룻밤 피곤한 몸을 의탁하기 위해 지불하는 돈은 불과 1만 원. 어지간한 모텔의 하루 숙박비가 3만 원인 것을 생각하면 그 파격적인 저물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싼 가격 탓에 이곳의 시설은 70년대 수준을 면치 못한다. 1평 남짓한 쪽방이 1만 원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거처이다. 아침나절이면 십수 명이 북적이는 공용화장실 1개와 좁디좁은 세면장 1곳이 부대시설의 전부다.

밤하늘의 별처럼 장판에 박힌 담배구멍, 지난해 장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벽지가 이곳의 인테리어라면 인테리어인 셈이다. 

당시 홍등가를 찾다 ‘볼일’을 마친 취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근처 청량리 시장과 경동시장, 약령시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잠을 청한다. 더러 노숙인들도 이곳을 찾는다. 할머니의 여인숙은 일용직노동자도 취객도 노숙인도 방만 있으면 다 받아들인다.

박 할머니는 “요즘에는 기름 값이 뛰어서 겨울에는 제 살 깎아먹고 산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길 철거하면 나는 아들네 가서 살면 되지만 이 치들은 어딜 가서 사나”며 자신의 여인숙을 찾던 손님들의 미래의 잠자리를 걱정했다. 할머니는 최근 숙박비를 1만 원에서 8000원으로 내렸다.

◇ 하룻밤 1만 원으로 고단한 몸 뉘어

여인숙 주인 가운데 가장 젊은 축인 50대 초반의 김모씨(여)는 6년 전 여인숙을 임대해 들어왔다.

‘숙박업을 하면 손해 볼 일 없다’는 주변의 권유로 이 업(業)을 시작할 때만해도 포부가 컸단다.

“다른 델 보니까 수리도 제대로 안 하고, 하여간 조금만 단장해놓으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벽지도 새로 깔고, 에어컨도 들여놨어. 이름도 ‘수도 여인숙’서 ‘수도 여관’으로 바꿨잖아.”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김씨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골목을 찾는 이들은 여인숙을 찾는 것이지, 그 윗급인 여관을 찾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말한다. “한 4~5년 지나니까 알게 되더라고. 아줌마가 분칠하고 새색시처럼 해봤자 누가 예뻐하겠어. 그냥 생긴대로 사는 거지.”

“처음에는 좀 무서웠지만 지금은 괜찮아. 손님들과 누님, 이모하면서 친해지면서 이제는 가족과도 같이 됐다. 짧으면 하룻밤, 길면 한두 달밖에 못 가지만 그래도 다 피붙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수도 여관에서 한 달째 생활하는 김모씨는 “고시원은 한 달에 18~20만 원 정도인데 조금만 떠들어도 쫓겨나 체질에 안 맞는다”면서 “25만 원 정도 되는 숙박비가 좀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이곳이 마음은 편하다”고 ‘여인숙 예찬론’을 펼쳤다.

이 골목의 대표 격인 장윤기 할아버지(70)는 방 10개짜리 천일여인숙의 주인이다. 24년 동안 이곳에서 여인숙을 운영했다. 그는 청량리 균형발전촉진지구 추진위원이기도 하다.

그는 오늘날의 동대문구가 이곳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인숙촌을 중심으로 상가가 조성됐고, 점차 동대문구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때는 상가들을 떠나버리게 한 홍등가 사람들이 사갈처럼 미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성매매특별법과 재개발에 밀려 스러져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색시집 잘 될 때는 몇 십억씩 벌어 나간다고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다 떠났어. 요새는 월세도 제때 못 낸다고 하대”라며 그들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안쓰러워했다.
 
청량리여인숙촌 일대에는 2010년 7월 주상복합상가가 들어서면서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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