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배 기자]“(조윤선 정무)수석께 한번이라도 보고했으면 지원배제 업무가 중단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후회가 된다” 정관주 전 정무수석비서관
“이재용 부회장에게 보고했다면 ‘스톱’ 해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

최 전 실장의 앞선 발언이 ‘블랙리스트’ 판결이 있던 날, 정관주 전 정무수석비서관의 발언과 단어까지 겹칠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이 대부분 법조계의 지적이다.

이를 두고 이재용 부회장이 조윤선 전 장관의 경우를 ‘벤치마킹’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보고받지 못해 상황을 몰랐으면, 책임질 지위에 있더라도 범죄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조윤선의 길’을 갈 수 있을까.

6일 조선일보는 이재용 부회장의 '조윤선식 무죄전략'이 성공 할 수 있나에 대한 전망을 내놓았다.

같은 진술, 다른 평가

최지성 전 실장과 정관주 전 비서관의 진술은 ‘보고를 안했으므로 윗사람은 몰랐다’는 내용면에서는 일치한다. 하지만 조 전 장관 측 관계자는 “진술의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한다. 그는 “조 전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부임했던 2014년 6월 당시에는 이미 김기춘 실장의 지시에 따른 지원배제 작업이 진행중이었다”며 “이 사건의 핵심은 김기춘 실장이다. 조 전 장관은 상급자이기는 하지만 정무수석실이 아닌 문체비서관실이 주무인 업무여서 보고선상에서 빠질 수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삼성의 후계자인 이 부회장에게 비선실세의 딸인 정유라씨에 대한 거액의 승마지원을 보고하지 않는 상황은 좀처럼 상정하기 힘들다는 게 이 관계자의 의견이다. 최지성 실장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이 부회장은 이미 그룹 안팎에서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임원(최지성 전 실장)과 정무직 공무원(정관주 전 비서관)이라는 차이도 두 사람의 증언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는 요소다. 정관주 전 비서관은 일단 직(職)을 떠나면 조윤선 전 장관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다. 그의 진술이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최 전 실장은 전직(前職)이기는 하지만 그가 실장을 맡았던 미래전략실 해체를 발표한 사람은 이재용 부회장이었다. 최 전 실장, 장충기 전 사장 등 임원 4명이 모두 이재용 부회장과 같은 법무법인 소속 변호인들의 변호를 받고 있는 점도 불리하다. ‘조윤선-정관주’의 경우처럼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 전 실장은 검찰 수사에서도 “(정씨 지원이)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려 해 (이재용 부회장에게)보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특검은 지난 4월 재판에서 이 말을 “총수를 위한 전형적인 총대매기 허위 진술”이라고 했다. 과거 한화, 한보, 대우 등 총수 관련 사건에서도 임원들이 이렇게 진술했지만 여러 간접사실을 종합해 총수들의 책임이 인정됐다.

“총수는 관련 없다” 진술, 법원의 평가는?

임원들이 ‘총수는 관련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법원은 이를 ‘곧이 곧대로’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기업범죄를 다뤄 온 한 법관은 “이해관계에 따라 변동될 수 있는 ‘진술’은 그다지 믿지 않는다. 세금신고내역,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등을 유심히 본다”고 했다. 이런 객관적 증거를 종합해 총수의 책임을 인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업범죄의 경우, 회사의 유일한 지배자가 회사 대표의 지위에서 범죄행위를 보고받고 확인·결재하는 등의 방법으로 행위에 관여하면, 사전에 구체적인 범죄 방법을 지시하지 않더라도 공모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게 법원 입장이다.

지난 2011년 부실계열사 부당지원 및 계열사 주식 저가매각을 통해 회사에 수천억원대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됐던 한화 김승연 회장의 경우에도 “공모한 사실이 없고 계열사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하거나 기획조정실 임원들의 판단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 회장이 회사 전반의 업무를 보고받고 지시했다”고 판단했다.

핵심근거는 검찰이 그룹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문건이었다. 경영기획실에서 각 계열사에 하달된 ‘회장님 지시사항’’중점관리 및 지시사항’등의 문서에는 김 회장의 계열사에 대한 지시사항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또한 경영기획실에서 압수한 ‘본부조직의 역할과 자세’라는 문건에는 김 회장을 CM(chairman)으로 부르며 일사불란한 상명하복 지휘체계를 유지한 정황이 나타났다.

이재용 부회장은 재판에서 “삼성물산 합병은 각사 사장이 결정한 것”이라며 “물산 쪽은 근무한 적도 없고 동향도 몰라서 실장님(최지성 전 실장)이 추진하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따랐다”고 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 있고, 박 전 대통령이 이를 도와 주는 대가로 정유라씨 승마를 지원했다는 특검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또 “정유라라는 승마 선수를 들어본 적도 없다”며 “승마 등 스포츠 지원과 관련해선 보고를 받지도 않았고 지시를 한 적도 없다”고 했다.

반면 특검은 이 부회장이 승마 지원에 직접 관여했다는 입장이다. 2014년 9월 대통령과의 1차 독대시부터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을 요구받아 최지성실장, 장충기 사장에게 지시해 대한승마협회 부회장으로 이영국 당시 삼성전자 상무를 내정하도록 했고, 2차 독대를 이틀 앞둔 2015년 7월 23일에는 직접 회의를 소집해 박상진 당시 삼성전자 사장으로부터 정씨에 대한 지원 상황을 보고받는 등으로 뇌물공여에 직접 관여했다는 게 특검 기소 내용이다.

현재 증거로는 ‘금융지주회사, 은산분리’등의 단어가 적힌 안종범 전 수석의 수첩, 박 전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만날 때 참고했다는 청와대 말씀자료 등이 제출돼 있다. 안 전 수석의 수첩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부정한 청탁’이 오갔다는 직접증거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독대의 정황증거로만 채택된 상태. 한화 문건과 같이, 이 부회장이 승마지원에 직접 관여했음을 드러내는 ‘스모킹 건’은 아직 없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다. 한 중견 판사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부인(否認)진술은 이와 배치되는 객관적인 증거가 나타나면 금세 신빙성을 잃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스모킹 건(smokikng gun)’이라 불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사건에서는 판사는 고민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사실을 끌어모아 유죄판단을 할 수도 있지만 형사소송법의 원칙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원칙이 적용된다. 판사가 피고인의 말을 믿지 않더라도 무죄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