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대한체육회장 후보로 박용성 후보 사퇴 촉구 요구를 하고 있는 장경우 전의원<가운데>
일개 부대를 동원시킨 의정부 사건

‘아이스크림’이 6개 학교로 퍼져나가면서부터는 점점 누가 아이스크림인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무슨 체계를 갖추거나 회장이 있거나 하는 클럽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각자 또래를 형성해서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곤 했다.

쉽게 말하면 통제가 안 되기 시작했던 것인데, 따져놓고 보면 누가 진두지휘해가며 달리 거창하게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터에 그것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창립멤버였던 우리 열 명은 또 우리대로 우리끼리만 함께 다니곤 했다.

그런데 하루는 ‘도봉산에 모이자’는 연락이 왔다. 6개 학교의 아이스크림이 일요일에 도봉산에서 한 번 만나 우의를 다지자는 것이었다. 아이스크림 단합대회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타학교 아이들은 진관사가 있는 정릉 쪽에서 올라가고 우리는 정면에서 올라가 도봉산 정상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 친구들은 그 날의 모임에 별반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열 명의 친구 중 몇몇은 시큰둥해하며 나오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오랜만에 바람 쐬는 기분으로 나머지 친구들과 함께 도봉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반절쯤 올라갔을까 갑자기 저 아래에서부터 요란하게 호각소리가 울리며 경찰들이 새까맣게 올라오는 게 아닌가, 웬 난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경찰들은 다름 아닌 우리를 잡기 위해 동원된 부대였으나...나는 영문도 모른 채 도봉산을 새까맣게 믈들인 그 대규모의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의 대상이 되어 의정부 경찰서로 끌려가야만 했다.

경찰서에 가서야 나는 그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이유를 알았다. 도봉산에 오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타 학교의 아이스크림들이 오르는 도중에 말 그대로 ‘난리’를 친 것이다 멀쩡하게 야ᄋ영하는 사람들의 텐틀,ᄅ 무너뜨리는가 하면,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소리를 지르며 위협을 하고 거기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쥐어박고 했다하니 그게 ‘난리’가 아니고 뭔가.

게다가 어느 틈에 내 친구까지 그 난리법석에 일조를 하고 말았으니...한 친구가 멀쩡하게 야영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잔뜩 폼을 잡고는 ‘시계 빼’호통을 치더니 어느 새 그 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던 것이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친구였고, 그 시계보다 더 좋은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경찰서에 끌려와 보니 그것은 ‘강탈’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경찰들이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그 친구에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온갖 구박을 다 해댔다.

“야 임마, 너 시계 더 좋은 것 있잖아? 왜 그랬어? 너 미쳤냐?”

“그러게 말이다. 정말 내가 왜 그랬는지...정말 미치겠다.”

사람들 앞에서 ‘잔뜩 폼 잡아보는 재미’에 그랬음이 분명한데 어떻든 일은 크게 터진 셈이었다. 비교적 얌전하게 도봉산을 등산했던 축에 꼈던 우리까지도 그 정도였으니 그 기세등등하던 다른 쪽에서야 어떠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아래쪽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이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신고가 들어오는 족족 살펴보니 아예 도봉산을 뺑 둘러 그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거대한 ‘조직폭력단’이, 그것도 대 낮에 서울 한복판에 출몰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경찰은 일개 부대를 동원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든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우리는 처음 잡힌 게 된통 크게 걸린 꼴이었다.

사건은 점 점 점입가경이었다. 끌려 온 3.40명의 학생들의 복장도 복장이려니와 그 복장 여기저기에서 ‘이상한 무기’들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쇠사슬이 나오질 않나, 희한한 쇠 조각이 나오질 않나... 그 때는 포크의 가운데 부분을 구부려서 손바닥의 깨끼 손가락 쪽에서부터 꽉 끼울 수 있도록 만든 ‘희한한 무기’가 학생들 사이에 유행이었는데 바로 그런 무기들이 수십 개씩 털려 나온 것이다.

딱히 쓸 곳도 없는 그런 ‘희한한 무기’들은 왜 그렇게들 지성으로 모시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 때는 그런 것 하나쯤은 지니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라면 유행이었고, 그게 또 멋져 보이기도 했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든 일은 크게 벌어진 셈이었다. 게다가 경찰들은 여기저기에서 ‘특수폭행’이니 ‘절도’니 하는 듣기만 해도 거창한 말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수사반장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그 하시는 말씀이 더 가관이었다.

“이놈들 말야, 알고 보니 순 일류고생들 아냐. 부모님들도 다 알만한 분 들이구만, 이거 안 되겠어! 빨리 사회부 기자에게 연락해!”

정말 앞이 캄캄해져 왔다. 기세등등하던 기는 다 어디로 가고 우리는 정말 꼬리를 있는 대로 다 내리고 그저 죽은 듯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친구 하나가 꾀를 내었다.

당시 우리 동창 중에 ‘이송용’이라는 아주 모범생 친구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임기 말기에 최강수 비서실장 밑에서 의전 보좌관을 지내고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총무처의 총무국장을 지낸 친구인데, 학창시절의 모범생답게 공무원 사회에서는 아주 모법적인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바로 그 친구였다. 바로 그 친구의 아버님이 당시 경찰고위직이었다.

친구의 꾀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들이 하도 윽박지르며 완전히 죄인 취급(하긴 죄인이 아니다는 건 아니지만...)을 하며 함부로 하니까 ‘내 아버님이 ᄋᄋᄋ이다’며 대책 없이 큰 소리를 친 것이다.

그런데 그 대책 없는 꾀가 먹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여기저기 소곤거리기도 하고 또 전화를 하기도 하면서 경찰들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 경찰들은 신고자들을 데려다 놓고 대질신문을 시작했다. 정확하게 난동을 부린 사람만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시계를 ‘강탈’했던 친구는 어느 틈에 피해자를 찾아가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 놓고 와서는 시치미 떼고 앉아 있는 대책 없는 대담성을 보인 결과 결국 ‘가담’했다는 것 외에는 달리 큰일을 저지르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은 하루 반 만에 훈방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밖에 타 학교의 친구들도 비록 시간차는 있었지만 별다른 일 없이 모두 나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송용의 아버님이 우리를 철저히 지켜 주셨던 결과였다. 더욱 고마운 일은 그 일을 학교나 집에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의 ‘내숭’은 완벽하게 지켜질 수 있었고, 게다가 의정부에서 그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도 비밀에 부쳐졌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한 때 있기 마련인 아이들의 방황을 ‘귀엽게’봐 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해야할 지 다마호사(多魔好事)라고 해야할지...그 일이 나에게는 큰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바야흐로 대학 입시를 6개월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는 의정부 사건을 통해 엄청난 쇼크를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연스럽게 대입준비에 몰입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입준비에 몰입할 수 있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또 만약 친구의 아버님이 비밀에 부치지 않고 학교에 이 사실을 통고했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그 역시 장담 할 수 없다. 때로는 이렇듯 인내와 너그러움으로 지켜봐 주는 어른이 아이들에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양의 공부를 한꺼번에 해야만 했다. 공부는 안하고 몰려다니기에 바빴으니 오죽 외울 것도 많았을 것이며 또 오죽 읽어야 할 책도 많았겠는가. 아예 책상에 책을 쌓아 놓고 차례차례 외어가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대입고사를 치렀다.

아이스크림의 사고뭉치 강창순

그 시절 친구들은 지금껏 변치 않는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일 년에 두어 차례씩은 정기적으로 날을 잡아 가족까지 모두 모이기도 하고, 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다 하면 제일 먼저 쫒아가고 쫒아 오고하는 친구들 역시 아이스크림 친구들이다. 내가 선거를 치를 때마다 마치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친구도 역시 그들이다.

강창순, 조남철, 임웅장, 이웅일, 한승주, 윰길상, 이광준, 이송용, 김평환,,,몇은 어느 새 세상을 떠났고 또 몇 명은 불행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개척하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변함없는 나의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 중에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놀림을 받으며 '아이스크림의 사고뭉치'로 통하는 친구가 있다. 바로 서울공대 원자력과의 강창순 교수다. 학교 다닐 때부터 공부를 잘했던 강창순은 친구들 중에서도 나하고 참 친했었는데, 언제 그 공부는 다 하는 건지 무슨 ‘일’이 있다하면 꼭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성으로 얼굴을 들이밀던 친구였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좋은데 꼭 나타나서는 어김없이 ‘말썽’을 피웠으니 우리들이 사고뭉치라며 구박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때 우리는 ‘열심히’ 사고치고 놀기에 바빴던 탓에 대학에 대부분이 낙방하고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구래도 나와 강창순이지만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하루는 친구 송영규의 생일파티를 한다며 적선동의 <부산집>에 모였었다.

발이 생일파티지 사실 우리가 ‘부시기’라고 불렀던 담배를 빡빡 피워대며 막걸리 몇 잔 나눠 마시고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를 불러대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때 옆방에서도 6명의 공군들이 제대 파티를 하고 있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있는 대로 악을 질러대며 노래를 하다 보니 자연히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그 ‘고성방가’의 틈을 타고 흐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강창순이 화장실을 간다며 일어섰다. 그런데 한참 후 옆방에서 치고받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강창순이 취중에 그만 옆방으로 들어갔는데, 그럼 그냥 조용히 나올 일이지 이 말썽꾸러기 강창순이 그냥 나올 리가 없다. 딱 들어가 보니 엉뚱한 방인데 조금 전까지 신경전도 벌였겠다 염치도 없겠다해서 나온 한마디가 걸작이었다.

“야! 너희들, 우리 노래하는 중이니까 조용히 해! 알았어?”

그리고는 문을 부서져라 닫으며 멋지게 폼을 잡고 탁! 돌아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보아하니 이제 갓 졸업한 대학 초년생인 듯한 애가 그래놨으니 그래도 막 제대하는 군인들의 기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는 뻔한 순서다. 말 그대로 집단 난투극이 벌어진 것인데 한밤중에 <부산집>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그런데 체육부에서 ‘운동’으로 단련된 우리들이 질 리가 없다.

아무튼 한바탕 ‘일’을 치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경찰이다’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야, 덕수궁! 하는 외침이 나왔고 우리는 일제히 흩어져 줄행랑을 놓았다.

드디어 덕수궁! 그런데 김영남, 장영도, 이웅일, 임웅장, 한수길, 조남철...등등 다 왔는데 딱 1명이 안 온 것이다. 보나마나 강창순이다 어찌하겠는가, 다시 가는 수밖에. 옆에 있지도 않는 강창순을 있는 대로 구박해 가며 가보니... 우리는 질겁을 하고 말았다. 부산집 문 앞에 ‘완벽하게 부서져 버린 몸’으로 강창순이가 쭉! 뻗어 있는게 아닌가!

알고 보니 우리가 ‘야, 덕수궁!’하면서 흩어진 이 후 강창순은 제가 무슨 ‘옹가리 통뼈’라고 홀로 다시 그 부산집으로 기어들어가 6명과 일대 결투를 재 신청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우리가 맞아야 할 것까지 혼자 다 맞은 셈이었다. 황야에서 홀로 공격을 당하고 외롭게 쓰러진 총잡이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가면서 있는 대로 구박을 해대던 우리들은 ‘울분의 눈물’을 머금고 강창순을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서도 처음 몰골을 볼 때는 놀래더니 여기저기 두드려 보고 하더니 곧 퇴원을 하라고 했다. 별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할 수 없이 내가 강창순을 들쳐매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에게 대충 설명하고 넘기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그 다음날 강창순의 어머니가 우리 집까지 아들을 찾아오시고 말았다.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아들을 앞에 두고 어머니는 처음에는 아예 말문이 막힌 듯 멍하게 서 계시기만 했다.

강창순의 어머니는 혼자사시면서도 하숙을 치면서 자식들을 키우셨는데 그 와중에도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꼭 하숙비를 안 받으시거나 나중에는 아예 장학금까지 내어 놓을실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었는데 그 성품이 소문이 나면서 한국일보에서 주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한 분이다.

그렇게 꿋꿋하게 속이 깊은 어머니도 막상 아들의 모습을 보자 기가 막히시는 듯 했다. 그리고는 드디어 날벼락이 떨어지는데 나 혼자 다 맞는 수밖에.

“이 의리도 없는 놈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말짱한데 어떻게 맨날 우리 창순이만 이 꼴이 되느냔 말이다. 도대체 너희같이 의리도 없는 놈들이 장차 뭐가 되겠다는 거냐! 아, 어서 뭐라 변명이라도 해 보란 말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억울하다면 왜 하필 나 혼자 그 된서리를 다 맞나하는 생각에 속으로 입이 석자나 나올 뿐이다.

그런데 강창순의 ‘말썽’은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는다. 강창순과 나는 유난히 등산을 좋아해서 일요일이면 꼭 인왕산을 오르곤 했는데, 그 날은 내 바로 밑 동생과 함께 산을 오를 때였다. 얼마쯤 앞서가며 오르고 있는데 저 밑에서 동생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차..창순이 형이...큰 일 났어! 지금 매 맞는다니까!”

아이쿠! 또 말썽이었다. 정신없이 내려와 보니 또 서너 명이 둘러싸고 강창순을 ‘혼내주고’있는게 아닌가. 뜯어 말려 놓고 알아보니...오르는 등산로에는 큰 버찌 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몇 사람이 그 버찌를 따 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치면 될 일을 또 강창순이 끼어들고 만 것이다.

‘여보쇼, 형씨들! 거 따먹지 말고 나무에서 당장 내려오쇼!“

“아니...이 나무가 당신 거요? 왜 상관이야?”

“뭐야? 당신 지금 뭐라고 그랬어!”

그리고는 또 뻔한 순서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 패는 ‘몰매’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글쎄 등산로에 멀쩡하게 서 있는 버찌나무 한 그루에 시비를 붙일게 뭐냔 말이다. 그렇다고 강창순이 싸움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꼭 하는 짓마다 몰매를 부르는 짓만 골라 했으니 하여튼 그 많은 재주 중에 그 재주 또한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렇게 매를 부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때마다 내가 된서리를 맞는 건 또 나였으니...말 그대로 사고는 혼자 쳐 놓고 그 뒤치다꺼리는 내가 다 맡는 꼴이었다. 어떻든 그 때도 다시 한 번 나는 ‘너는 멀쩡한데 어째서 창순이만 이 모양이 되었느냐’는 죄목 아닌 죄목으로 또 어머니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만 했다.

그 뒤에도 강창순의 얼굴은 심심하면 ‘멍’으로 ‘화장’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그 화장이 다 지워질 때까지 계란 마사지를 지성으로 하고 다녔다. 다 강창순의 특유의 성격이 빚어낸 일이었다. 친구 중에서도 강창순은 유난히 재주가 많은 친구였고, 누구보다도 지기를 싫어했는데 그 기백이 사소한 일을 그냥 넘기지를 못하고는 꼭 끼어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당하면서도 무슨 ‘쌈질’이 벌어졌다하면 또 제일 앞장서서 폼을 잡고 설쳐대는게 강창순이었다. 정말 귀여운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놓고도 또 공부는 항상 우등생이었으니 그 속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따로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볼 때는 예습복습이 거의 습관화 되다시피 한 것이 그 친구의 공부 비결 같았다.

어떻든 강창순은 그 재치 있는 성격 그대로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잘 관심을 두지 않던 원자력학을 미국 MIT에서 공부하더니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아 지금은 국내에서 후학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지금은 머리가 대머리가 되어 우리 중에서 제일 '노인네'같이 되었는데 그 재치만큼은 여전해서 우리들이 모였다 하면 언제나 웃음바다를 끌어내곤 하는 것 역시 그 친구다.

정말 평생을 함께 하고도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좋은 친구들, 내가 자기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삶이 갑자기 풍요로워진 듯한 행복함에 빠져든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아마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이리라.

두 친구의 불행

그 친구들을 말할 때 나는 또 두 친구의 불행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송용과 이광준이다. 물론 이송용은 아이스크림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때 그 친구의 아버님에게 그렇게 빚을 지고 난 이후 엉겁결에 가까워진 친구였다. 그러면서도 나와는 별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정작 이송용과 내가 친해진 것은 내가 정치에 입문하고 난 이후다. 내가 11대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들어갔을 때, 이송용은 총무처 총무국장으로 청와대 의전비서관을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막 정치에 입문한 터에 낯설고 물설은 정치권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반가운 친구로 몇 년을 알고 지내던 중 하루는 총무처에 들릴 일이 있어 그 친구를 찾으니 '병가'를 내었다는 것이다. 그 때가 88올림픽 직전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연락을 해 보니 '위암'진단을 받았다는게 아닌가. 정기적으로 있는 직원종합검진에서 그만 위암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의 불행은 이송용에서 끝나는게 아니었다.

이송용과는 이광준이라는 친구가 아주 친했는데 이광준은 바로 그 뛰어난 손재주로 우리들의 아이스크림 뺏지를 만들었던 바로 그 친구다. 사업관계로 미국과 일본을 자주 드나들던 이광준이 마침 국내에 있을 때 우리는 모두 모였다. 이송용도 함께 한 자리였다. 위암판정을 받은 친구를 앞에 둔 자리였기에 썩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느닷없이 이송용이 말했다.

"너희들도 미리미리 종합검진 받아봐야 한다. 내일 당장에라도 받아봐." 그런데 이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그래 나도 이번에 미국 들어가기 전에 종합검진 해야겠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씨가 될 줄이야. 이광준 역시 위암판정을 받고 6개월만에 이송용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특히 이광준이 운명하기 직전 그 뒤처리를 맡아 줄 친구로 하필 또 나를 지목했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친구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봐야만 했다. 그만큼 내가 느낀 아픔은 더 큰 것이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의 친구의 유언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도 그랬고, 미국과 일본 등지로 복잡하게 얽힌 그 친구의 사업관계 일들을 처리하면서 친구가 떠난 자리를 새삼 새삼 느껴야만 하는 것도 나에겐 큰 고통이고 아픔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어디에서건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건 이미 학교 다닐 때부터 나의 역할로 규정되어 버린 모양이다.

돌덩이가 되어 가슴에 남은 친구

아이스크림 친구 중에는 또 한 명 나의 가슴에 돌덩이가 되어 남아보린 친구가 있다. 내가 어렵게 13대 국회위원에 재기할 당시 아예 안산의 선거사무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나를 도와주었던 친구, 바로 김평환이다.

김평환은 유재방 대법관의 비서관을 지냈는데 그 후 사업을 시작해 왕성한 활동을 하던 친구였다. 축구선수 출신이었고 평소에도 운동을 계속해 아주 건강한 편이었다. 하긴 다 운동을 했던 아이스크림 친구들이니 어느 누구인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친구가 출근을 하는데 부인이 보니까 사람이 아주 이상해 보이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좀 멍해 보일 뿐 아니라,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비누나 수건을 아주 엉망으로 뒤섞어 놓거나. 보던 신문도 이상할 정도로 흐뜨러 놓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출군한 이 후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비서 역시 '오늘 회장님이 좀 이상해요' 하는게 아닌가.

그 다음 날 김평환은 서울대 병원으로 입원을 했다. 그제서야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찾아가 보니 친구는 의외로 좋아보였다. 일단 안심이었다. 마침 서울대 병원에는 고등학교 동창인 한대희 박사가 있어 돌아오는 길에 한박사를 만나보았다.

내 안심과는 달리 한박사가 하는 얘기는 겁나는 것이었다. 머리 뒷부분에 혈맥이 세 가닥 있는데 그 중에 두 개나 막혀버렸고, 하나씩 차례대로 수술을 해 보기는 하지만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참 큰일이다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한박사의 얘기를 전해줄까 하다가 아무래도 안하는게 좋겠다싶어서 그냥 돌아섰다. 그러나 막 병원을 빠져나오려는데 핸드폰이 왔다. 김평환이었다. 나와 한박사와의 얘기가 궁금해 전화를 한 것이다. 나는 짐짓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야,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더라. 내일 수술이니까 마음 편하게 먹고 쉬어라."

그러나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그 친구와 내가 나눈 참다운 대화의 마지막이었다는 걸 말이다.

수술 후 찾아가 보니 친구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있었다. 수술 후 30분 만에 심장쇼크가 와 긴급처지를 했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눈은 멀뚱히 뜨고 있는데 의식은 없으니 참 못 볼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조금씩 좋아지기는 했다. 손에다 뭔가 한자를 쓰기도 하고 또 무슨 이유에선지 큰 아들의 약혼자를 보면 손을

꽉 쥐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필 그 때가 얼마 전 97년 대선을 얼마 앞둔 시점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하루는 짬을 내서 찾아갔으나 여전히 별 차도는 없어 보였다. 부인과 한참을 얘기하고 나는 일어서면서 그 친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는 평소에 인내심이 강하니까 틀림없이 이겨낼 걸로 믿는다...그래, 나 그만 갈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말을 끝내고 막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내 손을 꽉 쥐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소리까지 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심 차츰 의식이 돌아오는 것만 같아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잡고 그런 교감을 나눈 것마저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내가 친구를 찾은 것은 그 일주일 후. 친구는 이미 그 희미한 의식마저 영영 잃어버리고 만 상태였다. 내가 다녀간 후 상태가 매우 좋아져 재활실을 왔다 갔다 하는데 그만 부축하는 사람의 작은 실수로 층계로 나가 떨어져 버린것이다. 무슨 운명이 그리도 가혹한지...

지금 친구는 기도원에 가 있다. 우리가 그 곳을 물으면 부인은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보면 뭐해요!' 하면서 한사코 친구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우리 아이스크림 친구들은 얼마간의 돈을 모아 전해 줄 뿐. 그 친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 부인의 마음을 우리 또한 잘 아는 터에 극구 보여달라 떼를 쓸 수도 없고 그저 애만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 우리 친구들의 가슴에 남겨진 친구, 김평환. 특히 어려웠던 나의 13대 재기선거에서 자기 일을 접어두고 안산에서 먹고 자며 나를 도와주었던 친구였기에, 그리고 무심결에 넘겼던 대화와 잠깐 동안 잡아 보았던 손이, 매 번 마지막이 되고 말았기에, 유난히도 더 아쉽고 유난히도 더 큰 아픔으로 남아버린 것이다.

지금 그 친구는 내가 이렇게 그 옛날의 추억을 회고하며, 그 시절의 치기까지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지...내가 정치에 남아있는 한 나는 또 몇 번의 '선거'를 치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하는 친구 둔 죄로 선거 때만 되면 열일을 제쳐주고 달려와 도와주던 김평환! 나는 다시 그를 떠올리며 그의 부재를 새삼 새삼 고통스럽게 느껴야만 할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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