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원로라는 말은 어떤 업에 오래 종사하여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을 일컫지만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자칭 원로가 득세하였던가. 그 고리타분한 단어가 풍기는 역겨운 여운 때문에 나는 그걸 질색한다. 당연히 나는 원로 변호사가 아니다. 내가 무슨 경험과 공로가 많은 변호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자칭 고참 변호사라해도 별 무리는 없으리라.

법조인 경력 근 30년에 얼마나 많은 소장과 준비서면, 기타 법률문서를 작성, 제출하였는가. 그런데 소장과 준비서면은 그 독자가 우선적으로 판사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그것들을 정성스레 작성해서 법원에 제출한다. 그들이 과연 우리들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만큼 정성들여 읽기나 할까? 쓰기보다는 읽기가 훨씬 쉬운 일인데 말이다.

나는 폼 잡고 법대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의 표정과 몸짓, 언행, 숨소리에서조차 그가 준비서면을 읽지도 않았고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런 판사일수록 더욱 거들먹거리니. 나는 온몸에서 기운이 쏙 빠져버린다. 그때부터 나는 법정이 몹시 낯설어 지면서 일종의 공포감을 느낀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판결문을 받아보면 주심판사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사회경험도 없으면서, 전문지식도 결여되어있으면서, 이상한 편견까지 가지고 있으니.

지금 나는 단순화, 이분법적 경향에 영향을 받아 ‘우리’와 ‘그들’로 영역을 나누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쯤해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그들은 가끔 자신이 전지전능한 신인 것처럼 착각할까, 아니면, 한번쯤, 가감 없이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신이시여, 신이 계시다면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소서, 지금 죽고 싶나이다.’라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을까. 그들 역시 보통 인간이다. 우리 모두는 하찮은 인간이다. 그러니 만날 허구한 날 서면 읽는데 얼마나 지쳤을 것인가. 얼마나 지겨울 것인가. 그래서 직업적 매너리즘에 빠져서 설렁설렁 눈대중으로 대충 읽고 대충 판단하지 않을 것인가. (물론 가뭄에 콩 나듯이 열심히 읽고 고뇌하면서까지 판단하는 판사들이 있을 것이다.)

결론인즉, 나는 그런 서면을 작성하는데 지쳤고, 그런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는 일도 우스웠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 작업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단절 또는 절단이 필요하다. 내 영혼이 그걸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동안 변호사 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말이다.

 

‘동물농장’과 ‘카탈로니아 찬가’를 쓴 조지 오웰은 작가가 소설을 쓰는 네 가지 동기를 열거하였다.

첫째. 순전한 이기심.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 그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둘째. 역사적 충동.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발견하여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기록해 두려는 욕망.

셋째. 정치적 목적.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넷째. 미학적 열정. 이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언어의 아름다움과 단어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그러나 나는 위 네 가지 동기 또는 욕망 중에서 순전한 이기심이나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단언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정치적인 것, 추상적인 이념, 주의 같은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역사의식도 사회의식도 희박하니 그 운동에도 무관심한 편이다. 나는 이데올로그, 사회 변혁가, 운동권,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문학이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같은 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미학적 동기만 있을 뿐이다.

나는 입체파 화가들처럼 입체적 플롯, 자기 내면이 강한, 규범적이고, 고독한, 특별한 성격의 작중 인물, 인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물음을 던지는 주제,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특한 컬러를 가진 미학적이고 예술적 형태를 띤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에 집착한다. 나는 서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산문에서 소설과 시의 중간쯤인 서정성이 풍부한 글을 쓰려고 무진 애를 쓴다. 항상 적절한 단어와 문구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해서 완벽한 문장과 문단을 만드냐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가 바라던,(나의 예술가적 영혼을, 내 온전한 애정을, 내 모든 증오를 집어넣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때 칸트가 말한 ‘미학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창조주, 신이 된다. 그러나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을 쓰게 되지 않을까. 휠덜린의 ‘엠페도 클레스의 죽음’처럼 말이다.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영감’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오르한 파묵이 말한 오스만 터키의 속담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쓰고 또 쓰고.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나는 평생 동안 상상력 과잉이었고 불안증과 과대망상에 시달렸기 때문에 글쓰기는 즐거움의 근원이 아니라 강박관념이었다. 쓰고 또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절제와 금기가 필요하다. 번지르한 미사려구 속에 설교를 기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란 결국 자기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 자기중심주의자,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이 나이에 한심할 정도로 무명작가일 뿐이다. 그게 멸시받은, 저주받은 작가의 운명이다. 내가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을까?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게 어중이떠중이들이 들고 다니는 허접쓰레기 같다면 내가 그걸 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모델 독자가 필요할 뿐이다. 단 몇 사람이라도 내 소설의 배경과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소설 속에서 작가도 모르는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찾아내는 진지한 고급 독자가 필요한 것이다.

 

장편소설 ‘사하라’의 에필로그와 단편소설집 ‘이별’의 서문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다. 그것에는 변호사가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그 편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 나이 60을 넘어서니 이제서야 철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고 세상 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論語의 六十而耳順이라는 경구가 비로소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꼭 쓰고 싶다면 이제는 소설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세상을 알아야할 만큼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나이에 무슨 소설을 쓴다고 하면, 소설작가가 되겠다고 우기면, 누군들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겠는가? 남들은 20대에 등단해서 젊은 시절 한창 문명을 날리고 60대쯤이면 벌써 반 은퇴하여 원로 대접을 받는 데 말이다.

내가 7년 전쯤, 사하라의 초고 30매 정도를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진지한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한결같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본업인 대학교수나 변호사 일에 전염하라고, 격려 아닌 격려를 쏟아냈다. 그들 모두가 문학에는 거의 무지막지한 수준의 동료 변호사였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막역한 후배인 Y변호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형님, 제발 그만 두세요. 유치한 짓 그만 두란 말이에요. 사람들이 노망들었다고 욕할 거예요.” 하면서, 노골적으로 핀잔을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취중진담이라고나 할까. 나는 아연실색 하였다. 내 하찮은 소설이 아니라 무릇 인간의 한심함 때문에 오랫동안 절망하였다.

그러나, 그런 노골적인 야유도 나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커다란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충고를 해주거나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오직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자신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만 한다.

말랑말랑한 감성적인 글을 쓰는 일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학술논문이나 법학 전문서를 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우선 글과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교류하면서 서로 유쾌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손으로 고통스럽게 쓰면서 내 몸과 글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그 운율 때문에 감탄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말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모르고 살아 온 것이다.

구석 방.

그 방은 남향이여서 고층 빌딩 사이를 뚫고 침입한 햇빛이 늘 찬란하였다. 그 빛의 수다스러운 달변이 나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나는 그때 사악한 죄악을 마음속에 획책하고 있었던가. 아니면 하릴없이 비감에 젖어 황폐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던가. 패배는 인간의 영혼에게 승리보다 깊게 침투한다. 패배는 비장함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리한 그리스 도시들보다 비극적으로 패배한 트로이를 더 기억한다.

그 경이로운 빛이 나의 가슴 속에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내 가슴 속 심연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그래서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쳤다. 읽고, 쓰는 일처럼 괴롭고 유쾌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한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을 때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 마침표는 배가 항구에 도착하여 바다 밑바닥으로 던지는 무거운 닻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늘 불만족스럽다.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다. 문장의 밀도와 완성도가 괜찮은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날 괴롭힌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쓰레기가 아닌지, 그런 느낌을 받는 날이 많다.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한 주에도 수십 장의 글을 썼다. 변호사의 주 업무인 소장이나 답변서, 준비서면, 가끔 형사 고소장, 법률의견서 등을 쓰는 일 말이다. 그 이외에도 나의 주 전공인 국제거래와 신용장거래, 금융거래와 관련해서 제법 두툼한 법학전문서 12권, 이들 분야에 대한 90여 편의 학술논문과 판례평석을 발표하였고, 200여 편의 사설과 기타 칼럼을 갈겨썼다.

그것들은 모두 한결같이 너무나 직설적이고 명쾌하며, 한 치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는 논리 정연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세상만사, 인생사 중에서 어느 것 한가지인들 그렇게 명쾌하고 논리적일 것인가. 모두가 불분명하고 확실치 않은 것 투성이일 뿐이다. 인간 삶의 조건 역시 의문투성이인 것이다. 그러니 주식투자도, 사람 사는 일도 고달픈 것이다.

나도 지금쯤은 그 지겨운 흑백논리의 멍에를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중간 영역인 회색의 영역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렇다. 세상을 살다보면 흑백논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희끄무레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래서, 완전히 검거나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좋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악과 선이 사이좋게 공존한다. 그러나 세상은 애매모호하여 대부분 회색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세상의 허공에 대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왜 없겠는가. 나는 가슴 속 응어리를 이야기로 풀어내야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막 이야기인가.

사막에는 완벽한 침묵이 존재한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귀중한 말은 침묵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언어가 되기 전에 먼저 침묵과 조우한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황량한 사막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대지에서 울리는 느낌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 사막은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주술적 마력을 갖고 있었다. 초인간적인 대지의 기운이 엄청난 힘으로 인간의 영혼을 빨아들인다.

요즈음의 경박한 세상에는 하찮은 일상을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수필이나 에세이류, 여행기 또는 신변잡담을 무슨 의식의 흐름 수법이라는 그럴듯한 미명 하에 주절주절 써놓은 일기장 같은 소설, 자폐증에 걸린 사람의 중얼거림 같은 소설,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강박관념이 든 나머지 얼토당토 않는 해괴망측한 소설들이 넘쳐 난다.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수만 년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의, 익명의, 이름 있는 이야기꾼, 작가들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넘게 똑같은 형식과 내용, 재료,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우려먹었으니, 단언컨대 새로운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변형이고, 변주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이미 쓰여졌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만 과거를 기억하고, 모방하고, 가끔 훔칠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거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우리 소설들은 이야기는 너무 빈약하면서 변곡점에서 느닷없이 또는 지나치게 비틀어서 탈이다. 그랬으니 현대 소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와 비교하면 그 역사가 극히 짧은 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일부 평론가들과 작가들 스스로 소설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제는 소설의 본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그러면 소설은 살아남을 것이다. 인류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애니멀이고 스토리리슨닝 (storylistening) 애니멀이기 때문에 결코 이야기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세부 묘사를 통하여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그러므로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설일지라도 앞뒤가 잘 들어맞는 꽉 짜인 이야기여야 할 것이다. 소설은 현실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성실해야 한다. ‘왜 소설보다 현실이 이상해 보이는가. 소설은 어쨌거나 말이 되어야 한다.’ (마크 트웨인)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작가는 가능한 선까지, 그리고 가능한 한 자세히 소설이라는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

나는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의 오랜 경험은 인간 내면의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삶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면 삶에 대한 희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걸 잃은 후에야 겨우 뭔가를 깨닫는다.

나는 인간 삶과 죽음의 조건, 인간의 운명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탐구할 생각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 안에 죽음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고 죽음의 시작이 삶이다.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장편소설 ‘사하라’에서 김규현(金圭賢)은 투아레그족 청년 이브라함(Ibraham)과 함께 사하라 사막 남쪽을 여행하던 중, 고물 자동차가 고장 나고 사막 속의 사막에 갇히면서 목이 말라 갈증 때문에 죽는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과격하게 말하면 그는 사막에 완전히 매혹되어 사막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사막에서 목말라서 갈증으로 죽어야 했지만,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결코 사막에 완전히 매료된 바도 없고 더욱이 사막에 미친 사람도 아니다. 이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순진한 독자들 몇몇은 자주 그와 나를 동일한 인물로 오인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소설의 화자와 작중 인물의 타자성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나는 상상적 세계인 소설 속 인물을 실제 인물과 동일시하고 싶은 독자의 정당한 욕망을 이해한다. 작가와 소설의 주인공이 미분화된 고백 형식의 사소설, 1인칭 소설이 한 때(일본의 초기 자연주의 문학 시절) 일본 소설의 전통이 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실재하는 인물이거나 어떤 인물의 모방이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어리석고, 무구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을까. 왜 그는 모진 고통 속에서 살다가 일찍 죽어야만 했는가. 이게 이 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제기하는 진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는 온갖 죄악과 부조리, 고통과 고난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 사악한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인간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무구한 사람이 크나큰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정의로운 인간이 사악한 인간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사악한 인간들이 횡행하고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 지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는가. 정말 위대한 유일신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종말론적 계시론은 ‘때가 온다.’고, 악의 시대가 거의 끝나간다고 강조했다. ‘회개하라, 복음을 철썩 같이 믿어라.’ 그리고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어떤 고통도 없고 가난도 없는, 진리와 정의, 평화만 있는 유토피아,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000년이 넘게 기다렸지만 어떤 기미도 느낄 수 없으니 독실한 범신론자인 내가 유일신을 믿지 않는 이유이다.)

일부 독자들은 말한다. “소설이 쓸데없이 어려워요. 그래서 몇 장 넘기다 읽기를 포기했지요.”, “소설에 깊이가 있기는 해요.”, “소설이 너무 재미없어요. 재미가 없으면 소설이 아니지요.”, “김규현이 누구예요. 인터넷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실제 인물이 맞나요.”, “그런데 사하라에는 몇 번이나 다녀왔지요?” 나는 그 말들을 듣는 순간 그들이 그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일상생활에서 너무 바쁜 그들이 그걸 왜 읽겠는가. 수긍이 간다.

스탕달은 1822년에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연애론’을 출간했지만 그 당시에는 11년 동안 단 17권 밖에 팔리지 않았다. 그때 출간 당시 스탕달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 책의 평판이 어떤지, 출판사에 넌지시 물어 보았다. 출판사 영업 직원이 대답했다. “그것은 신성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도 집어 들거나 펴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하라는 지금 신성한 책이 되었다. 나는 그 소설에 대해 자부심과 자포자기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실낱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그 책도 가냘픈 생명력으로 살아남으리라. 그래서 나는 그 책을 다시 읽기가 민망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붙잡고 있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내게는 너무 중요하다. 소설의 배경을 바라볼 때 대가는 그것을 단지 충실하게 묘사하는 일은 피하는 법이어서 사실 그대로 그리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본질만을 전달하려고 한다는데, 나는 대가는커녕…… 그래서 반복해서 세밀한 묘사에 집착하고, 밀란 쿤데라가 말한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분주하고, 철학적 주제와 관련한 사색을 소설의 기본 토대로 삼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시된 수많은 테마들과 모티브들이 변주되면서 분해되고 용해되며 서로 뒤엉켜서 화음을 이루고 결국에는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심혈을 기울여 수정하고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건 우울한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글이란 수정하지 않으면 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발표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 고쳐야만 한 편의 글이 탄생한다. 소설도, 시도, 에세이도, 편지도, 소장이나 준비서면도 고치고 고쳐야 한다. 내가 아는 한 톨스토이도, 헤밍웨이도, 피츠제럴드도, 샤토브리앙도, 드 메스트르도, 밀란 쿤데라도, 최인훈도, 소설가 모두, 시인들도 모두 끊임없이 수정했다. 르 메스트르는 그의 ‘아오스토 골짜기의 문둥병자’를 17번이나 고쳐 썼다.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유명한 학자이면서 중국 최초의 직업 변호사였던 등석은 논변 이론에서 좋은 말을 ‘큰말大辯’이라고 하였고, 하찮은 말 또는 나쁜 말을 ‘작은말小辯’이라고 분류하였으니 소설은 분명히 하찮고 나쁜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小說은 中說도 아니고 大說도 아니고 소설이면서 雜說이다. 그러나 소설은 잡초처럼 질기고 포용 능력 역시 한계가 없다. 소설은 잡설이므로 그 내용 속에 논문이나 학설, 시나 에세이, 르포, 잠언, 오마주, 패러디, 독백, 철학이나 과학, 온갖 잡설을 다 풍부하게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소설의 정체성은 훼손되지 않으니. 오! 너무나 위대한 잡설이여.

사하라는 오랫동안 쓰고 또 쓰는 과정에서 전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주제를 포용하게 되고 그 주제들이 위태롭게 소설의 구성을 떠받치고 있다.

사하라는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유럽으로 건너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서구 문명사회에서 온갖 풍상과 슬픔, 모멸을 겪은 사람, 사막의 여행 가이드 이브라함과 건축설계사이면서 오직 정글과 사막만을 여행하는, 오디세우스처럼 험한 길을 방랑하는 건축 설계와 감리, 엔지니어링 회사인 (주)공간의 김규현 상무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갈증으로 죽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막 도시 타만라세트를 출발한 것은 2000년 6월 15일 이른 아침이었다. 그 며칠 후 사하라 남쪽에서 사막의 미로에 갇혔다. 김규현 상무는 44세의 나이로 7월 9일 죽었다. 이브라함은 그 이틀 전에 죽었는데 짐작키로는 32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이상 내일은 없었다. 그들은 오직 과거를 이야기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나온 인생 역정을 담담하게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소설 사하라는 분해 또는 해체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 조각들을 주워 모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하라 남쪽 사막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작가인 내가 죽게 한 것이 아니다.) 우선 여행소설이어서 여행의 의미, 그것의 목적,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허무감, 인간이 언제부터 허리를 펴고 걷게 되었는지, 걷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미학적 토대에서 인간 삶의 조건, 삶과 죽음,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신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신은 존재하는지 마는지, 신은 살았다가 언제부터인가 죽어버렸는지, 그건 타살인지 자살인지.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지, 꿈은 무엇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꿈을 꿔야 하는지. 꿈은 영혼의 자양분인지, 인간의 운명은 무어란 말인가, 운명까지도 유위전변有爲轉變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운명은 예정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나의 삶의 궤적에서 내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주제어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소설의 구성에 있어서 미학적 욕망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로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모티프, 행동과 실존적 상황을 통해서 점차 드러나게 된다.

사하라, 사막, 낙타, 사막의 도시 타만라세트, 거룩한 신부님, 유목민인 투아레그족, 아프리카, 사바나, 사헬지대, 밀림, 원시 부족, 분쟁, 사자, 에이즈, 남쪽 바다, 늙은 여자, 사이코패스, 종교의 타락, 무슬림, 움미인 마호메트, 위대한 여행가 오디세우스, 불운한 반 고흐, 영원한 여성인 어머니, 언제나 그리운 동생, 갈증과 죽음, 고독, 침묵, 망각,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미래, 절망, 농담, 희극, 무無, 무상無相 無常 無想, 등등.

또한, 김규현은 건축가이므로 건축의 미학, 그의 플라토닉 연인이었던 (그러나 플라톤은 살아생전에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손희승은 사진 작가였으므로 사진의 미학,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죽으면서 또다시 이별하므로 이별, 약간 멜로 드라마적이고 감상적이고 유미주의적이긴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와 그의 아내 심현숙은 열렬히 사랑하고 육체적 쾌락을 누리고 그리고 결별하였으므로, 달콤 씁쓸한 육체적 사랑과 쾌락의 의미, 에로티시즘, 오르가슴, 나르시시즘, 아이러니, 결별의 의미 같은 것 등. (그러나 나는 작가로서 창조한 작중 인물인, 지극히 쾌락주의자이고, 현실적이고, 잔인하고, 개성이 강렬한 심현숙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팜므파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치명적인 악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졌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그녀 같은 멋진 여자를 실제 만날 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별의 주제는 인간 삶의 조건, 삶과 죽음, 신의 존재 여부, 여행의 의미와 함께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순전히 내 견해일 뿐이다. 내가 죽은 후라도 어떤 유별난 비평가가 나타나서 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 슐라이어마허는 ‘비평가는 작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안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비평할 용기와 함께 찬양하는 용기가 필요하리라.)

그러나 나는 소설가가, 이야기꾼이 주제에 억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니 몇 개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고상한 단어들 (때로는 그 개념이 가변적이고 모호해질 수 있는)만이 주제어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모든 예술에는, 소설, 이야기, 희곡, 시, 음악, 미술, 조각, 영화, 드라마, 만화, 신문기사, 텔레비전 뉴스, 신중한 언어에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모두가 주제가, 즉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제는 그것들의 본질적 특성인 것이다. 심지어 사소한 말, 농담에도 그것은 들어있다. 우리가 흔히 ‘뼈 있는 농담’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작가는 주제를 의식하거나 주제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에는 그것이 저절로 따라오니까 말이다.

 

사랑과 이별.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버린다면 그게 어찌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모든 이야기의 영원한 주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진정한 사랑이란 이별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자신의 깊이를 모르게 마련이고(K. 지브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다.(W. 쿠퍼) 그리고 모든 이별에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큰 고통이 뒤따른다. (C. 에이 루이스)

 

죽음과 이별.

죽음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 이별은 삶의 무상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이별은 동의어가 아닐까. 이별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시공간의 멀어짐을 의미하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운명적 결별을 의미하며 죽음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사람도 운명을 막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일찍 죽는다. 선한 사람은 일찍 죽고, 악인은 늦게 죽는다. 이게 바로 그 소설의 큰 테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규현과 이브라함은 참으로 착하고 선한 사람이지만 불의에 일찍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에는 천수를 다 누리고 죽는 자연사(이때는 집의 침대 또는 병원의 침대에서 편히 죽는다), 자살, 살인에 따른 죽음, 천재지변(act of god) 같은 신의 짓궂은 장난에 의한 죽음, 막다른 운명의 장난에 의한 죽음, 오만한 인간의 광기에 의한 죽음, 제도적 살인 예컨대 국가기관의 고문, 학살(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스탈린의 대학살, 크메르 루즈 대학살을 상기하라.)이나 인간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멍청한 판사에 의한 살인 선고와 그 집행 등에 의한 죽음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죽지만 이별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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