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타 순트 세르반타

박타 순트 세르반타! 풀이하면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이다. 법대생들이 입학하면 맨 처음 배운다는 이 말은 정치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나의 정치철학이 되었다.

11대에 국회에 들어가 처음으로 했던 대정부 질문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바로 ‘박타 순트 세르반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였다. 이제는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오히려 상투적인 감이 없지 않지만, 나는 어떻든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 말을 나의 철칙으로 삼았고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나는 불과 4년만에 정치권에서 ‘박타 순트 세르반타’라는 말은 얼마나 허무하고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내가 정치권에 받는 첫 번째의 상처요, 앞으로 내가 받아야 할 수많은 상처의 서곡이었다

씨뿌려 밭부터 갈아보자!

서서히 12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보좌역’이 뭔 줄도 모르던 나는 4년 동안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정치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자 지구당 욕심이 났다. 전국구 의원이 아니라 ‘표’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당당하게 심판을 받아보고 싶어진 것이다.

‘표’룰 통해 자신을 평가받고 싶은 욕구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구이며 정치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의 선택이다. 나는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정말 운경 선생의 말씀대로 밭을 갈구고, 씨부터 뿌려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적잖은 자신감도 있었다. 당시 나는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국가대표팀의 단장을 맡아 국제대회를 치르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고, 김용태 대변인이 지역구에 자주 내려가 있는 바람에 부대변인으로서 외부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는 이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재무위원회의 활동도 당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자신감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의견을 당 지도부에게 미리부터 수차례 밝혔다. 물론 장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 고향 시흥이 있는 곳은 <제 4선거구>였는데, 당시 원내 부총무였던 윤국노 의원의 지역구였고 재선의원이었기에, 만약 윤의원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돌아오기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 지도부에게 ‘물론 고향에서 나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지만, 꼭 그곳이 아니라 할지라도 일단 지역구에서 ’표‘로 심판받고 싶다’는 생각만을 전했다. 그 때는 권익현 씨가 대표가 되기 전, 그러니까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였다.

공천과 다름없던 약속

그러던 어느 날 권익현 사무청장이 나를 불렀다.

“당신 지역구 문제로 이종찬 총무와 상의를 했는데 말야, 아무래도 4선거구는 어렵겠고...부천은 어떤가?”

부천이라 하면 ‘부천’과 ‘김포’와 ‘강화’를 아우르는 선거구였다. 당시 이곳은 신능순 의원의 지역구였는데 연로한데다 몸이 불편해서 12대 선거에서는 다시 출마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잘 되었다’싶었다.

부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옛날에 할머니댁에 갈 때마다 부천 ‘소사’에 내려 차를 갈아타고 했던 곳이었기에 나에겐 그렇게 생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천의 중동에는 ‘장말’이라고 해서 일종의 장씨 집성촌((集性村)이 있는 곳이었다.

“좋습니다. 나와 인연이 전혀 없는 곳도 아니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래? 잘 되었구만. 나 역시 좋으니까 이종찬 총무와도 상의해 보지!”

나는 그 길로 이종찬 원내총무 방으로 갔다.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

“그래? 잘 되었네! 나도 물론 좋지! 그래 우리 한번 잘해보자구!”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잘 해결되었다. 당의 실세라 할 사무총장과 원내총무로부터 ‘약속’을 받은 셈이었고, 그것은 곧 ‘공천’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장 부천으로 이사를 했다. 운경 선생의 말씀대로 ‘밭 갈고 씨 뿌리는 일’부터 하자면 내 생활기반을 옮기는 것이 순서였기 때문이다. 내 의사를 전해들은 부모님도 흔쾌히 나를 따라 부천으로 옮겨주셨다.

그 때부터 온 가족이 뛰기 시작했다. 내 선거를 직접 치루어 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달리 뾰족한 전략 전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열심히 뛰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쳇말로 하자면 ‘무대포’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내가 믿었던 것은, 우리 당은 물론이고 다른 당 역시 공천 심사기간이 아직도 한참 남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거전에 돌입하기 훨씬 전이었기 때문에 ‘미리부터 이렇게 뛰다보면 경험 없는 내 단점을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사무총장과 원내총무의 약속을 미리 받아낼 수 있었던 나의 이점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중앙당에서 부대변인으로 업무가 많았다. 김용태 대변인의 지역구 순방이 잦았기 때문에 대변인 역할을 거의 도맡다시피 해야만 했다. 결국 일요일과 저녁 늦게 활동할 수 밖에 없었다. 나머지 시간은 온통 아내의 몫이었다.

내가 정치에 돌어온 이후 처음으로 해 보는 선거였고, 처음으로 받아보는 ‘심판’이었기에 아내는 정말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장경우라는 사람을 알리는 작업, 그리고 새로운 지역구 정치를 펼쳐보이겠다는 포부를 아내는 나대신 열심히도 알리고 다녔다.

얼마 후, 공천심사 기간도 아닌데 3곳의 지역구 위원장을 교체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심상우 대통령 비서실장이 미얀마사태로 숨지는 바람에 그 후임 자리와, 충북 괴산지역의 한 지역구, 그리고 바로 내가 뒤고 있는 신능순 의원의 후임 자리를 미리 교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았다. 그 사이에 권익현 사무총장은 대표가 되었고 그만큼 나의 공천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확정’을 기다리며 아내와 함께 열심히 뛰고 있었다.

그것은 배신이었다.

그 날도 나는 중앙당의 업무 때문에 좀 늦게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내 역시 막 들어왔는지 옷도 벗지 않은 채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아내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저 소문이 좀 이상해요!”

“무슨 소문? 왜?”

“박규식 씨라고...알죠?”

“박규식? 누구더라?”

“이종찬 총무 지역구 부위원장하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아, 맞아!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소문이 ...글세 그 사람이 이곳에서 공천받기로 청와대와 내약이 되었다고...”

“뭐야? 허허...아니 여보, 그럴 리가 있어? 서울 종로의 부위원장으로 서울에서 사는 사람을, 그것도 인지도도 전혀 없는 사람을 당에서 공천할 리가 있나? 그래도 나는 현역 국회의원인데,,, 안 그래?”

“정말 그렇죠? 말이 안 되죠?”

“그럼! 선거가 다가오니까 이런 저런 뜬소문이 도는 걸 거예요. 따지고 보면 이것도 경험이네 뭐!...괜히 처음 선거 치른다고 미리부터 조마조마해서 이런 저런 소문에 휩쓸리기 시작하면 우리만 낭패보니까, 지금 이 순간부터 아예 귀를 닫고 삽시다!”

“그래도 웬지...당신이 한 번 더 확인을 받아보면 어떨까요?”

“허허... 걱정할 것 없다니까...당신, 당 대표와 원내총무 약속이 얼마나 무서운 건 줄 몰라? 아무튼 지금부터 아예귀를 닫아버려요.”

그리고는 끝이었다. 나는 아내의 말을 그냥 흘려버렸다.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우리는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결국 사실로 확인되고 말았다!

나는 충격 이상의 쇼크를 먹었다. 순간적으로 ‘아 이것이 기절하는 거구나!’라고 느낄 정도로 휘청! 하면서 머리 속이 아득해져왔다. 한 참 후에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해 봤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때 마침 김용태 대변인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는 나를 위로했다.

“이해해! 당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야.”

“...”

“아직 젊잖아! 다음 기회를 본다고 생각해. 장의원이 이해해야지 어떡하겠어?”

“다 좋습니다. 그런데 대체 이유나 알아야 이해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

김용태 대변인도 그 이상은 뭐라 말을 못했다. 나는 당을 나왔다. 햇살이 내려 비치는 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한 게 마치 나를 조롱하는 듯 했다. 순간 그제서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나는 그 길로 내 선거운동을 도와주던 동지들을 만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는다면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또렷해지면서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있었다.

끝내 이대로는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나는 저녁이 되자 권익현 대표집을 찾아갔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화가 득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장의원이 참게.”

“도대체 이유나 좀 알아야 참아도 참을 것 아닙니까?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서두르지 말고... 나중에 언젠가는 장의원도 알게 될거야.”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이상의 대답을 듣지 못한 나는 다시 이종찬 원내총무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이종찬 총무 역시 그 이상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이한동 총장과 권익현 대표에게 다시 물어보지...지금 나로선 그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어.”

소문대로 ‘청와대 내약’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 길로 다시 동지들을 만나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내 평생에 그렇게 술을 마셔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곤 눈을 떠보니 집이었다. 만 하루 만에 깨어난 것이었다. 깨어보니 내가 직면한 상황은 더욱 더 선명하게 내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치욕감, 허탈감, 절망감, 자괴감, 참혹함, 분노...하나하나 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그 많은 감정들이 아예 통째로 거대한 산이 되어 압박해 왔다.

당장 제일 견딜 수 없는 것은 가족들을 바라볼 낯이 없다는 것이었다. 딴에는 그래도 처음으로 치러보는 선거랍시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석대로’하자는 마음으로 온갖 북새통을 다 떨며 가족들을 전부 그 일에 매달리게 했던 것인데... 당장 이 일을 가족들에겐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결국 나는 그 날의 충격으로 담배를 끊어버렸다. 그것은 내 앞에 도사리고 있는 그 엄청난 ‘현실’에 대해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보복’이었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14년 동안 나는 한 번도 담배를 잡아보지 않았다.

아, 정치란 게 이런 것인가?

그 날의 사건은 정치에 입문한 이후는 물론이고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내가 맨 처음 겪은 가장 큰 좌절이었으며 절망이었다. 그것은 내 인생관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뭔가 열심히 노력을 하면 그 노력에 대한 평가를 일정하게 받아왔고, 또 뭐가 되었든 한 번 시작하면 열심히 매달리게 되는 내 성격에 대해 어는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적어도 ‘열심히 하면 꼭 보답이 온다’는 내 인생관을 한 번도 의심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그렇다면 내가 그 동안 온실 속의 화초와도 같았단 말인가?”

“정치란 게 이런 것인가?”

“그 앞에서 정치인들의 ‘약속’은 정말 그렇게 휴지조각이 될 만큼 하찮은 것인가?”

정말 알 수 없는 게 정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꺼번에 밀려오는 이런 저런 의문들을 풀지 못한 채 거의 한 달 가까이를 그 수렁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정치를 떠나 동서증권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그 때 얘기가 오고갈 때면 사람들은 나에게 묻곤 한다.

“정치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셨겠어요?”

정말 그랬던가? 아니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환멸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기 같은 것이 나를 더 지배했다.

“정치? 그렇게 알 수 없는 건가? 그렇다면 알 때까지는 해 봐야 되는 것 아닌가?”

정말 그랬다. 마음을 그렇게 먹자 내 성급함도 보이기 시작하고, 정치의 어려움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정치의 양면성이 어는 정도 감잡히는 듯 했다. ‘절묘한 줄타기’와도 같은 정치의 속성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다시 시작해 보자’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다시 시작해 보자는 내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에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치란 한 번 기회를 잃으면 다시 언제 그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동서증권에서 1년 반을 보내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정치를 생각했다. 물론 증권가에서의 생활이 싫은 것도 아니었고, 또 누구보다도 잘 적응하며, 남보다 앞서가는 실적을 남기는 경영인이었지만, 정치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남아있었다.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제 좀 더 차근차근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결국 나는 3년 만에 13대 선거를 계기로 다시 정치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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