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우 전 의원 자유선진당 입당
드디어 안산에 말뚝을 박다.

87년. 나는 아예 안산으로 집을 옮기고 안산, 시흥, 광명 등지를 누비고 다녔다. 당시 13대 국회의원 선거가 89년 예정이었으니까 선거를 2년 넘게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 곳의 지구당 위원장이 누구이건 상관없는 일이었고, 공천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냥 열심히 뒤고 보자, 그러면 지역구민들의 선택을 받을 것이다는 생각 뿐 이었다. 당에서 뭐라고 하든 아예 귀를 닫아버렸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선거운동 규재가 심하지 않았기에 내 행동은 훨씬 자유로웠다. 만약 요즘처럼 엄격한 선거법이었다면 지구당 위원장도 아닌 내가 지역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달리 무슨 선거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로 뛰며 열심히 쫓아다닐 뿐이었다.

그 즈음 하루는 국회의장으로 계시던 운경 선생으로부터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막 인사를 드리자마자 운경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 고향에서 뭐 한다며? 허허...이제 정치가 뭔 줄 조금 안 모양이지? 잘했어 잘했어! 정치는 바로 그렇게 시작하는거야. 유권자 이상으로 확실한 공천은 없는 법이지. 내가 역시 사람을 잘 보긴 했구먼!”

내 소식을 들은 운경 선생은 일부러 나를 격려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고, 나 또한 그만큼 큰 격려는 없었다.

이건 예사로운 시위가 아니다!

바로 그 해. 드디어 6∙10항쟁이 시작되었다. 뭔가 직감적으로 ‘이건 예사로운 시위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정치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그 현장을 지켜봐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곤 매일같이 서울 시청 앞으로 나갔다.

그 때는 마음이 참 편했다. 더 이상은 여당 의원도 아니었고, 직장도 그만 둔 상태였다. 그 때 나는 언제 여당 의원이었느냐 싶게 오히려 시민들의 시위에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 그래서 예전의 동료 의원들을 만나면 서슴치 않고 내 의견을 개진하곤 했다.

“지금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민정당은 더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 때는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 그들 역시 이 ‘예사롭지 않은 시위물결’에 심상찮은 변화를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내 심으로는 내 의견에 상당 부분 공감하는 듯했다.

어떻든 결국 그 결과로 6∙29가 터져 나왔다. 당시에는 온통 6∙29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사실 그것은 엄연히 시민들의 승리였다. 그 현장을 낱낱이 지켜보았던 나의 확신이자 믿음이다.

그런데 6∙29는 나의 계획에 상당한 수정을 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직선제를 계기로 헌법이 바뀐 것이다. 12대 국회는 3년으로 단명하는 국회가 되었고 선거구 또한 새로 조정되었다. 이른바 지금의 ‘소선거구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면적인 건 아니었고 1∙2선거구라고 해서 어떤 곳은 서선거구로, 어떤 곳은 중선거구로 한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내려가서 뛰고 있었던 4선거구는 안양 따로, 시흥 광명 따로, 각 각 2명씩을 뽑는 걸로 되어 있었다. 안산과 웅진만 1명을 뽑는 선거구로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기회다 싶었다. 안양과 시흥 등은 각 각 2명씩 뽑기 때문에 그만큼 안전하고, 때문에 대부분의 지망자들이 그 곳으로만 몰렸다. 나는 주저없이 안산 옹진을 선택했다. 일단 오려는 사람이 적으면 졍쟁자도 적을 것이고, 무엇보다 내 고양이 안산의 전신이었던 시흥이 아니던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공천 얘기로 설왕설래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공천을 안 주고에 관심이 없었다. 공천을 안 준다면 무소속으로 뛰겠다는 결심이었고, 정치권이 ‘약속’이나 ‘내약’등에 한 번 크게 당한 나로선 더 이상은 그런 데에 목을 매지 않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장경우 모르면 간첩

새벽이면 일단 산책로로 나간다. 그리곤 ‘저 장경우라고 합니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인사를 하고 ‘뭐 불편하신 건 없는지요’하면서 시정에 대한 불만 등을 듣는다.

그리고 내려오면 7시. 이제 바로 반월공단 통근버스가 오는 곳으로 간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다시 ‘저 장경우라고 합니다’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버스에 다 타버리면 이제 버스에 올라타 누가 듣건 말건, 그간 파악해 온 안산시정의 문제점을 일일이 얘기한다.

그러면 운전기사는 ‘빨리 내료요!’하며 화를 벌컥 낸다. 그러면 나는 또 ‘죄송합니다...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요’하면서,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나의 포부를 밝힌다. 흡사 약장사가 따로 없는 셈이었다.

그렇게 몇 대의 버스를 순회하고 나면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이제 다시 시장을 돌기 시작한다. 어디에서 작은 주민모임만 있다 해도 달려가서는 나를 소개하고 민원을 듣는 일일 1년 여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안산 일대에서 ‘장경우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모든 유권자를 한 번씩은 다 만나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막상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별로 선거 운동을 할 게 없을 정도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선거공고 후 18일 동안, 안산보다는 옹진군을 다 돌아볼 수 있었다. 당시 웅진군은 영종도, 영흥도 등 18개의 유인도가 있었는데, 한 번 들어갔다가 뱃길에 막혀 버리기라도 하면 황금 같은 선거운동기간을 그 곳에 묶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후보들이 옹진군은 등한시하기 마련이다.

어떻든 그 와중에 들어오는 돈은 하나도 없고, 그간 모아놓은 돈을 차근차근 빼먹어가며 그렇게 버티자니 막상 선거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정말 돈이 없었다. 나중에는 아내의 패물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주변사람들에게까지 폐를 끼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특히 나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반월공단 내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던 정우영의 도움은 잊을 수 없다. 이 친구는 주기적으로 사무실에 와서는 사무 보는 직원에게 ‘내놔 봐!’라고 입을 연다. 사무실에서 배달시켜 먹었던 음식값이며 밀린 전화세, 월세 등의 명세서를 내 놓으라는 얘기였다.

직원이 마지못해 명세서를 내 놓으면 이제 그 명세서를 들고 나가 하나하나 다 빚을 갚아주고는 또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나의 고등학교 친구인 김평환, 대학 동창인 김정삼 등은 거의 안산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나를 도와주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자주 해야만 했다. 가령 점심시간 때나 저녁 시간에 손님이 찾아올 때는 참 난감하다. 분명 모시고 나가서 밥을 먹자면 내가 돈을 치루어야만 하는데 그런 돈이 없으니 나는 할 수 없이 ‘조금 전에 뭘 좀 먹었더니 밥 생각이 없네요! 하거나, ‘아이구 조금 전에 손님이 와서 좀 이른 식사를 했는데...’하면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리곤 후다닥 집으로 달려와서는 밥을 먹고 다시 사무실에 가 앉아 있는다. 이런 식으로 버텼으니 사람들은 ‘저렇게 돈도 없으면서 무슨 국회의원을 나오겠다는 거야? 했음직도 하다. 물론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그 정도로 쪼달렸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거의 고집에 가까운, 나의 야심찬 ‘투자’때문이었다.

후회없는 투자 ‘중소도시 발전 연구소’

내가 안산에 내려가자마자 맨 처음 한 것이 바로‘중소도시 발전 연구소’였다. 그즈음 수도권 주변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함께 중소도시들이 막 확장되어 가던 시기였고, 동시에 시흥과 광명, 안산, 부천 등지에서는 문제점들이 하나 둘씩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수도권 주변의 중소도시들은 마치 ‘수도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도시’와도 같다는 것이 내 문제의식이었다. 수도권에 둘 수 없는 공해물질공단이 조성되고, 수도권의 인구과밀을 해결하기 위해 베드타운형 도시로 전락해 버리고, 또 그로 인해 중소도시의 교통문제 등은 갈수록 심각해져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먼저 중앙대 건축과의 학과장이던 하성규 교수, 서울대 행정대학의 김동건 교수, 서울대 상과대학의 김신행 교수 등을 모시고 ‘사단법인 중소도시 연구소’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가 87년 초였다.

그 때부터 종소도시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단계별로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그 연구결과를 각 기관에 돌리면서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 그것은 당장의 13대 선거를 목표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내 정치적 기반을 경기도 내에 두겠다는 나의 결심의 결과였고, 좀 더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장기적으로 정책을 펴 나가겠다는 내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말 그대로 ‘정치인이 되겠다면 씨부터 뿌려라’는 운경 선생의 가르침을 비로소 실천에 옮기는 셈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간 모아왔던 나의 전 재산이 이 중소도시 발전 연구소에 투자되었다. 내 딴에는 과거에 사장까지 지낸 터였기에 그 정도 돈이면 되겠지 했는데 막상 문을 열어놓고 나니 그걸로는 턱도 없었다. 결국 집을 담보로 은해 빚을 낼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도 그 빚을 안고 살아간다.

그라나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나의 평생의 꿈이고 나의 정치적 분신이자 나의 정치적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소도시의 결집체 경기도! 나는 남은 여생은 이곳에서 펼쳐질 것이고, 나의 능력과 꿈은 바로 여기에 바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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