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사랑으로 행하는 자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전날 꿈을 꿨다. 20년 전에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는 꿈이었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꿈이었다. 너무 생생한 꿈. 비체가 마치 잘 지내고 있는지 묻는 것처럼, 무척 만나보고 싶은 감정을 숨기는 것처럼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그때 애매하게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비체는 1990년 늦은 봄 아무런 귀띔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비체는 단테의 영원한 여인 베아트리체의 애칭인데 그가 붙여준 것이다.

지금, 그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해서 비현실적일 만큼 먼 곳에 가 있었고 안개 속처럼 몽롱할 뿐이다. 그는 비체를 그렇게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아온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맨 처음 만났던 날, 조금 당황해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뺨 한가운데를 붉게 물들었던 사랑스러운 홍조가 떠올랐다.

다시 늦은 봄이다.

그날, 그는 오전 내내 뒤숭숭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는 무작정 걷는다. 그에 대한 구구절절한 옛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그가 간절히 보고 싶다. 아침도 점심도 굶었지만 배가 고프지 않고 밥 먹을 생각도 들지 않는다. 거리에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몇몇은 가볍게 말하고 헤프게 웃으면서 지나간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회색 구름이 낮게 드리워 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앞 그 커피숍에 다다랐다.

그들이 1988년 맨 처음 만났던 곳이다.

그는 이십대 초반 즈음에 작고 더러운 방에서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자와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이후로는 이성과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그 무렵 변성기에 여드름 투성이이고 지저분한 얼굴의 작은 요정들, 소년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매혹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남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체는 약간 마르고 헝클어진 머리, 놀라울 정도로 맑은 눈을 가진 전형적인 변두리 아이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야위었지만 유연했다. 그는 사랑에 빠졌다. 비체는 그에게 육체적 감각, 육체적 환희를 일깨워 주었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때는 어느 순간에 행복의 절정을 느꼈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심장을 찢어낼 듯 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였다. 그럴수록 강박관념과 같은 집착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비체는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갔다. 도망갔다.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될 것이고 자신의 삶을 독자적으로 살게 될 터이다. 여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아이들을 두게 될 것이다. 그는 정상적인 삶에 안착할 것인가. 그건 축하해야할 일이 아닌가. 그의 미래를 축복해 주어야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질투심 때문에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절망하였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 대신 알코올로 그 고통을 마비시키려 하였다.

그는 2시간째 에스프레소 커피의 짙은 향기를 음미한다. 한 테이블 지나서 건너편 자리에는 품이 헐렁한 셔츠에 꽉 조이는 청바지 차림의 눈이 큰 여자가 앉아 있다. 예쁘고 곱상한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아서 거의 맨 얼굴이다. 길게 기른 치렁치렁한 검은색 머리카락을 매끄럽게 빗어내려 흰 목덜미 뒤로 묶어 늘어뜨렸는데 그녀는 영락없이 막내 여동생이다. 그녀는 여동생과는 뭐 하나 닮은 데가 없었지만 그러나 모든 게 다 닮아 보인다. 얼마나 오랫동안 여동생을 만나보지 못했는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이명소리가 귓속을 울렸다.

그 순간 그녀가 일어나 나갔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연거푸 담배를 피우며 자꾸 시계를 본다. 커피 잔에 남은 한 모금 커피를 마셨다. 엄청나게 쓰다. 그러면서 누군가 말했던 ‘커피는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는 말을 되새긴다.

커피는 사랑이다.

그가 계속 커피의 향기 속에서 피어나는 옛 생각에 잠겨 있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충격을 느꼈다. 심장이 예민하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입 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그가 커피숍의 정면 넓은 창에서 안을 향해 기웃거리다가 문을 열고 왼쪽 다리를 약간 질질 끌면서 엉거주춤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가 넓은 유리창을 두들겨 팬다. 그들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영원처럼 느껴졌던 몇 분간이 지나갔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몇몇 커피를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공공연히 그들을 바라본다.

비체가 말했다. “저도, 지난밤에 당신을 만나는 꿈을 꿨지요. 너무 생생했거든요. 그래서인지…… 막연히…… 여기까지. 다시 만날 운명이었겠지요.”

그는 생각했다. ‘같은 날 밤에 같은 꿈을 꾸고, 약속도 없이 옛날 같은 곳에서 헤어진 연인과 기적처럼 재회하는 것은 틀림없이 운명 때문일 거라고……. 이 운명은 비켜갈 수 없을 거야…….’

비체가 어쩔 수 없는지 계속 더듬더듬 말을 한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십년이 훌쩍 사라졌네요. 그러나 미안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전, 그때 조용히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도망쳐야만 했었지요……. 가슴이 미어질 듯 했지요…….

당신을 만나면서부터 제 식성을 확실히 깨달았지요. 당신은 다소 소극적이었어요. 그때 혼란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요. 자신의 육체가 스스로를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결국 들키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떨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전 그때 벌써 훌쩍 커버렸지요. 당신 때문이었겠지요. 그리고 강하고 적극적인 남자가 필요했지요. 뚱뚱한 남자…… 몸에 털이 많고 배가 많이 나온 남자에게 끌리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 몰래 낙원동의 게이 바에 들락날락하게 되었지요. 그 바는 실제 뚱뚱한 남자만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동성애자만 출입했거든요. 그때부터 항문이 망가지기 시작했지요.”

“그랬었구나……. 그랬어……. 넌,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몹시 궁금하겠지. 네 얼굴에 그렇게 써있으니까. 그런 거야……. 난 군대에 가서 그 증세를 더욱 확실히 자각했고, 도저히 육체적 욕망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지. 그래서 내 인생이 평탄치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지. 처음에는 고참의 지극한 편애와 짜릿한 성적 자극에 빠져들었고, 그가 제대해버리자 내가 점찍어 놓았던 졸병을 유혹했어. 군대를 제대한 후에는 대학을 그만 중퇴해버렸지. 아무런 희망이 없었으니까. 평생소원이던 수의사의 꿈을 접은 거지. 그리고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는 거야.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하면서 말이지. 사회는 우리를 절대로 받아주지 않거든. 지금은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나도 늙었거든. 그리고 지쳐버렸지. 가끔 두통이 오고 반복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지.”

“저의 경우에는 말이지요. 저는 누나들 틈에서 여자애처럼 자랐지요. 그러나 외아들이었으니…… 부모님의 성화를 이길 수가 없어서 결혼까지 했었지요. 예식장에서 하객을 모시고 정식으로 했었지요. 그러나 곧바로 헤어졌지요. 도저히 여자와의 결혼은 견딜 수가 없었어요……. 결혼을 해서는 안 되었는데. 그때 도망가야 했었지요. 그리고, 다시 가끔 당신을 생각했었지요.”

“……”

“그러나 전, 막나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이 완전히 정신병자로 만들었으니까요. 우리는 사회적 약자, 철저히 버림받은 자, 소수자였지요. 희망이 없었습니다. 술주정 때문에 누구한테나 집적거리고 시비를 걸고…… 수시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경범죄로 처벌받았지요. 교도소에도 밥 먹듯이 들락날락했었지요. 잊기 위해서 마약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약도 점점 센 걸로…… 마리화나는 너무 약해서…… 머리를 처박고 가루를 흡입했지요. 다시 메스암페타민이나 애시드 쪽으로……. 그걸 공급해주는 자는 아주 개새끼인데…… 피도 눈물도 없지요. 오직 돈밖에 모르지요. 그 얘길 길게 해서 뭐하겠어요.

어쨌거나 전 만신창이가 되었어요. 가족과는 완전히 의절했고요. 저는 사회에 대해 증오와 다름없는 분노를 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분노할 힘마저 없어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삶에 크나큰 그늘을 드리웠던 비체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초췌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처참한 몰골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지금 살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비쩍 마른 몸에 걸친 헤진 옷은 낡은 데다 비에 젖기까지 해서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머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감지 않았는지 떡진 채로 머리카락이 뒤엉켜 있다.

노숙자 생활을 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무언가가 그를 지금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반쯤 독백이었다.

“제가 옛날부터 밤을…… 짙은 어둠을 사랑했던 것 기억하시지요. 어둠은 모든 불행한 것들을 감싸 안으니까요. 저에겐 지금 밤이…… 어둠이…… 필요한 거예요. 간절한 부탁이 있어요.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겠어요. 당신만이 할 수 있어요. 절 데려가 줘요. 남쪽 그 해안 절벽 있지요. 전 몇 번이나 여러 가지로 시도했지만 불가능했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화내지 마세요. 사랑의 힘이 필요하지요.”

그는 입 안에서 갑자기 깊은 피 맛이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혀로 살점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걸 피와 함께 꿀꺽 삼켜버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처음 만난 날도 오늘처럼 토요일이었다. 비는 한풀 꺾여서 가랑비로 내렸다. 그새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수 향일암은 언제나 일출의 광경이 눈부시다. 향일암으로 오르는 길 중턱쯤에서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인적이 드문 호젓한 길이 바다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고 바다가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해안 낭떠러지가 있다. 먼 바다에서부터 달려온 거친 파도는 높이 솟아있는 검은 바위에 부딪치며 악몽 같은 괴성을 내뱉었다.

떨어진 낙엽들이 바다 쪽에서부터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에 빗발치듯 흩날렸다. 돌풍이었다. 검은 먹구름이 밀려오고 잠깐 동안 가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바람이 잦아들면서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맑게 갠 드넓은 하늘을 가로질러 노란 햇빛이 눈부시게 빛났다. 바위에 부딪치고 물러나는 파도소리가 소나무숲 속의 빈 터에 아련한 여음을 남기면서 쓸고 지나갔다. 길섶에 서있던 나뭇가지들에서 물방울이 눈물인 것처럼 떨어진다.

회색빛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있는 수평선 너머로 작은 어선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다. 배는 벌써 황혼의 희미한 빛 속에서 하나의 점이 되어 마침내 보이지 않았다.

우중충한 하루. 악몽 같은 하루.

비체는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사랑의 힘으로.

사랑은 언제나 절벽 끝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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