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속인 심진송
공원 묘역에 있는 아버지이 묘지 앞에 선 심진송은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다.

다른 묘지들 앞에는 상석도 놓였고, 묘비도 서 있었으나. 아버지의 묘지엔 아무 것도 없어 황량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무용학원 해서 번 돈으로 가장 먼저 아버지 비석부터 세워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비석을 세우고 났더니 더 이상 아버지 모습이 꿈에 나타나지 않더라구요.”

심진송은 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스물다섯 살 되던 해 중매로 결혼을 해서 아이가 태어났으나 곧 잃어버렸고, 신혼 생활은 결코 평탄치 못했다. 결국 서로 갈라선 다음 무용학원 운영에만 전념, 나름대로 생활의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무용학원을 꾸려 나가는 동안에는 평범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특별히 병을 앓았다거나 사후세계 체험같은 이상한 경우는 없었거든요.“

그러나 내게 남다른 능력이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 뭔가 마음속으로 갈망하면 그 욕구가 이뤄진다는 걸요.“

멍하니 먼 산을 쳐다보다가 앞으로 이렇게 일이 풀릴 것 같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이 맞아 들어갔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란 일을 두 번이나 겪었다.

‘한번은 누군가를 몹시 미워했는데, 얼마나 행동이 얄밉고 고약했던지 나도 모르게 ‘어휴 저 사람이 없어졌으면’하고 저주했어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미움의 대상이었던 그 사람이 갑자기 세수를 하다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이웃의 누가 돈이 아쉽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줬는데, 돈 빌린 아줌마가 갚지도 않고 줄행랑쳤지 뭡니까. 나야 소개 잘 못해 준 죄밖에 없는데도 돈 빌려 준 아줌마가 워낙 닦아 세우는 바람에 대신 물어 줬어요. 그러나 돈 받을 쪽에선 오히려 한 술 더 떠 이자까지 변상하라고 욕을 해대는 거예요. 나는 소개만 해 줬을 뿐 실제 돈 빌려주는 것은 보지도 못했거든요.”

 결혼,,그리고 재혼, '신끼' 발동해

 
화가 난 심진송은 이자까지 내 놓으라는 그 아줌마를 향해 ‘생사람 잡겠네’하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거예요. 그 아줌마 남편은 포크레인 기사였는데, 내가 저주스런 말을 퍼붓고 며칠도 안돼 그 남편이 운전석에 앉은 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지 뭡니까?”

두 번이나 섬뜩한 경험을 겪은 후 한동안 심진송은 입조심을 했다. 어지간히 화가 나더라도 함부로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심진송은 86년 새로운 가정을 꾸몄다. 사업하는 남편은 동분서주했고, 그녀 역시 무용학원을 그만 두고 부동산 일에 관여했다. 그러나 남편의 일이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부부는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에 있는 2백만 원짜리 셋방으로 이사를 갔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월세 방에서 심진송은 ‘칩거’하다시피 지내야 했으며, 남편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보기 위해 매일 바깥으로 뛰어다녔다.

한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심빈송의 ‘신끼’는 사업 실패로 인한 충격 때문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버리자 환상처럼 세상일들이 다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방안에 틀어박혀 혼자 넋두리를 늫어놓기도 했으며,, 참다못해 집밖으로 뛰쳐 나가서 이웃인 ‘원미동 사람들’을 붙잡고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놓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나를 보는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반찬거리를 사러 원미시장에 들르면 가게 아줌마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습니다. ‘저 여자, 뭐가 덮어 씌워 미쳤대 글쎄’ 라는 그들의 귓소리를 나는 다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심진송은 도무지 ‘신끼’를 자제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슴을 찢어 놓는 ‘한’이었으며, 복받쳐 오르는 설움같기도 해서 그녀는 자신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우리 아저씨(그녀는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도 미쳤다고 그랬겠습니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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