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앞으로도 영원히 흐를 것이다.

— 워즈워스

 

이브라함이 마르세유에 와서 몇 년쯤 지나서 그 여관에서 청소부로 자리 잡고 일하게 되었을 때 (정확하게 말하자면 1991년 봄이었다. 그가 프랑스에 온지는 벌써 3년 반이 지났고 사막을 떠난 지는 5년 쯤 되었을 때이다.), 여관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던 늙고 고독한 사람을 어떤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그의 프랑스 이름은 그냥 자크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베트남에서 어머니가 불렀던 베트남 이름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브라함은 그 당시 너무나 외로웠으니까…… 그와는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노인은 키가 작으면서 깡말랐고, 그러나 얼굴은 주름살이 너무 많았으며 첫 전투 때 파편에 튀긴 흙먼지가 얼굴을 때리면서 생긴 안면경련이 있었다.

그는 매월 첫 주의 월요일이면 꼬박꼬박 한 달분 방세를 미리 지불하였기 때문에, 또 그가 점잖고 신사적이고 방을 깨끗하게 사용한다는 이유로, 평소 무덤덤한 여관 주인도 가끔 밤이면 온 여관을 울리는 그의 지독한 기침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하여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돈은 그가 전쟁에 참전하여 서부전선의 뫼즈 강 전투에서 독일군과 싸웠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무슨 군인연금과 할머니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약간의 신탁기금에서 매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규칙적으로 모르코 출신의 늙은 여주인이 경영하는,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생 장 요새 부근에 있는 제마엘프나 카페에 출근해서, 그러니까 아침 9시부터 오후 9시 경까지 (가끔은 일찍 또는 늦게까지) 창가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꼼짝달싹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 여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카페까지 걸어가서 그 자리만을 계속 지킬 뿐이었다.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잃어버린 세월을? 또는 장소들과 이미지들을?

참담한 전쟁의 기억? 뫼즈 강을? 독일의 수용소를? 투르빌이나 생라자르 역을? 죽음의 해안을? 탕헤르나 케이프타운? 아프리카를? (그는 도대체 아프리카에서 얼마 동안이나 있었을까? 아니면 헤매었는가? 어느 도시를? 밀림을? 사막을? 뭘 하면서?) 그리고 잠시 멈췄던 이곳저곳을? 강물을?

그리고 그 카페에서 수프와 전채 요리, 또는 메인 요리만 먹으며 간단한 식사를 하고 밤이 되면 치즈를 안주로 하여 싱글 몰트위스키 몇 잔을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그러나 가끔 기분이 내키면 적포도주 한 병을 비우기도 했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무슨 사교 모임이나 클럽에 참석하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마르세유에서 연중 열리는 축제와 사육제에 참여하거나 음악회, 전시회,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다. 그는 삶의 경계선에서 안개처럼 부유했으니까 인간 혐오증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과 지나치게 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냥 가벼운 목례나 눈인사만 할 수 있는 관계를 원했다. 그러니깐 이브라함만이 예외였다.

 

그가 훨씬 훗날에 그 날의 전투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었다. 그 해 (1940년) 이른 봄 그에게는 첫 전투의 경험이었다.

성능이 좋은 독일 전투기가 새하얀 은빛 궤적을 그리며 낮게 날면서 기관총을 난사하였고 그 흙먼지가 강하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얼굴에 심한 통증이 왔고 몸이 아주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질척질척한 땅바닥 진창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때 운이 나쁘게도 얼굴이 주근깨로 덮여있던 알자스 출신 병사의 머리가 총탄에 맞아 사라졌고, 머리가 붙어있었던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콸콸 넘쳐흘렀다. 곧 포탄이 분노한 듯 쉴 새 없이 날아들어 굉음을 내며 폭발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과 말들을 죽였다. 주위에는 신원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시신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콩 볶는 듯한 독일군 소총 소리와 박격포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해 초여름, 그때 전투는 미친 듯이 격렬하였지만 독일군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하여 허둥대다 맥없이 패배하였다. 독일의 탱크들은 너무나 쉽게 마지노선을, 뫼즈 강을, 마른 강을, 센 강을 차례로 돌파해 버렸다.

그리고 철저히 유린된 후 점령되어 독일 군대라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프랑스. 그들은 옷깃에 은빛 배지가 번쩍이는 초록색 제복을 입고 반짝반짝 광이 빛나는 장화를 신었다. 번들거리는 붉은 얼굴은 말끔하게 면도를 하였다. 건장한 체구를 지닌 사내들이 히틀러 찬가를 휘파람으로 불어대고 제국군인 특유의 절도와 권위를 뽐내며 파리 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페탱. 늙은이. 고집불통. 음험한 인간. 베르됭의 영웅이 돌아왔다. 페탱이여, 프랑스를 구하소서. 북부 점령지와 남부 자유지역. 패배와 배신, 배신자. 연대와 저항.

 

자크가 말했었다. “그 해 5월의 마지막 전투 후, 나는 오랫동안 일종의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있었던 거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 심리적 실명에 빠져서 줄곧 눈을 뜨고 있으면서 이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거지. 세상이 흐릿하게나마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수용소에서 한참이 지나서였어. 독일 군의관이 심리 치료를 해주었거든. 그는 전쟁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기라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지. 그때 군의관이 치료제라고 몰래 갖다 주는 독한 술을 마셨지. 잊기 위해 마시고 또 마셨지. 눈은 돌아왔어. 술이 약이었던 거야.

그는 날 그냥 타타르인 또는 동양인이라고 불렀어. 그는 아시아 쪽에 거의 무한정 매력을 느끼고 전쟁이 끝나면 장기간 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지. 몇 년쯤. ‘그건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야만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그는 러시아 전선으로 전출되어 갔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죽었어.”

그는 만날 독한 술에 취해 있었고, 가끔 콜록콜록 심하게 기침을 하였으며, 때로는 혼자서 무언가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에게서는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고 유일하게 사람의 냄새가 났다.

이브라함이 말했다.

“그 시절에 그에게서 프랑스어도 정식으로 배우고…… 문명 세계에 대하여 다른 많은 것도 알게 되었지. 그는 소르본느 대학 중퇴생이었거든. 강제징집 되었기 때문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

그는 처음에는 너무 외로운 나머지 말동무가 필요해서 나에게 프랑스어를 열심히 가르친 거야. 난 이미 알제 시절부터 조금씩 배우고 있었으니까 더욱 빠르게 터득하여 그를 기쁘게 해주었지. 그는 아시아계 유색인종이었으니까, 같은 유색인종인 나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거야.

그러나, 그는 그때, 터무니없게도 날품팔이에 불과한 나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막무가내로 강요했어. 그것도 읽기 어려운 책을. 내가 말했었지.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나는 아프리카에서 왔는데, 사막의 족속인 투아레그란 말이에요. 아랍어 책도 그렇고 프랑스어 책도 그렇지요. 책이란 죄다 너무 어려워요. 어렵게 시작해서 어렵게 끝나거든요.’ 그가 말했었지. ‘글이란 기호이니까 이 세상의 암호문인 거야.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나에게도, 누구에게도. 시인들도 자기 시를 잘 모르고 비평가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거야. 그렇지만 넌 읽어야만 하지. 그래야만 이 세상의 수수께끼를 알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스스로 선택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증오가…… 아프리카인의 끓어오르는 증오가 완화될 수 있는 거야. 그러나 진실을 말해야겠지. 힘들게 가르쳐야만할 진짜 이유가 있는 거야. 그건 나를 위한 거겠지. 신을 이해할 수 있는 말 상대가 필요하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으니까. 말들이…… 죽기 전에 한 번쯤 쏟아낼 수 있어야할 거야. 뭐 안 해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그걸 꼭……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신은 이미 죽었다고, 또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세상에 아버지들은 다 똑같은 거야. 아버지는 모세인 거지. 계명이 많으니까. 그런 거야. 아들에게 늘 강요를 하지. 먼저 뭘 반드시 하라고, 공부하라고, 뭘 읽으라고, 신을 믿으라고 하지. 또는 뭘 하지 말라고, 술을 마시지 말라고, 신을 믿지 말라고 하지.

사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그 문자와 그 신기한 지식에 너무 목말라 있었으니까, 강렬한 욕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프랑스에서 살아가자면 반드시 알아야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많이 읽고, 또 읽고, 지식을 흡수했던 거야. 덕분에 책을 열심히 읽는 습관이 들었지.”

매일, 조금씩 독서를 늘려가면서, 이브라함은 처음으로 자신을 답답하게 조이고 있는 속박 같은 낡은 껍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세계에 대해 더욱더 많은 생각을 떠올렸고,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자크가 말했었다.

“프랑스가 식민지 통치를 하였던 시절,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 일인데, 내가 어렸을 적에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지가 이미 60년이 넘었어. 그런데 베트남 언어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지. 기억 속에 구멍이 뚫려서 빠져 달아나 버린 것이겠지.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는 거야. 지금은 내 베트남 이름까지도 말이야. 한 번 가슴 속에서 지워져버린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해도…… 결코 멈추지 않고 유유히 흐르던 강물 이외에는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지.”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 상사 회사의 사이공 지사에서 평직원으로 근무하였던 투르빌 출신의 아버지와 베트남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메콩 강 하류 삼각주에 위치한 빈롱의 외갓집에서 8살 때까지 살았다.

그 후 투르빌로 갔다.

투르빌은 센 강이 지친 여행을 끝내고 영불 해협의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항구 도시이다. 강 하구의 오른쪽에 투르빌이, 왼쪽에는 도빌이 있다. 그때는 파리 생라자르 역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직후 투르빌 외곽 어촌에 있는 할머니 집에 맡겨져 몇 년 간을 산 일이 있었다. 그곳은 햇볕이 은은하고 강렬하였다. 그 햇빛은 인상파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빛깔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은빛 파도가 햇빛에 유난히 번쩍거리는 바다가 아름다웠다. 밀물 때면 고물에 삼각돛을 단 작은 어선들이 통통거리며 텅 비어있는 긴 해안선을 뒤로 하고 바다로 나갔다.

할머니는 억세게 일했다. 투르빌의 부두 어시장에 길게 늘어선 생선 좌판에서 어부들이 갓 잡아온 펄떡이는 생선을 팔았다. 할머니 몸에는 생선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외로운 할머니는 손자에게 한없이 인자했다. 투르빌에서의 어린 시절은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그의 생에서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그가 투르빌의 기차역에서 기차에 오를 때 할머니와 자크는 헤어지기 싫어서 손을 잡고 오랫동안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그 후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자식들과 버림 받은 아이들, 사생아들이 주로 가는 파리 근교의 기숙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아버지 집으로 가야했다. 그때 아버지는 남부 벨기에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였고 파리의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이후, 그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아버지와는 그나마 인연이 완전히 끊겼다.) 그는 가톨릭 신부들이 운영하는 반군대식 기숙학교에서 6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너는 말이지…… 아시아계 혼혈아가 프랑스 육군에서 군대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할 거야. 다른 사병들과는 한 식탁에 앉지도 못하였지. 군대에서도 여전히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했어……. 유럽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뿌리 깊은 멸시가……. 오랫동안, 아마 중세의 십자군 전쟁 때부터 존재하였을 거야. 지금도 그렇고. 나치는 그래도 유대인을 불량 인간으로 인정하고 대량 살육을 감행하였지만 아시아 사람은 아예 원숭이 취급을 했어.

나의 인생에서는 두 사람의 정신적 지주가 있었던 거야. 모두 할머니들이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인 베트남의 외할머니와 내 아버지의 어머니인 투르빌의 할머니. 그러나 난 미혼모에게서 태어났지. 내가 사이공 항구에서 마르세유 행 배에 오를 때 할머니가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주었거든. 할머니의 가냘픈 손만은 언제든지 기억할 수 있지. 그리고 내가 기숙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투르빌 역에서 기차에 오를 때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말했었지.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거야. 세상은 무섭지 않단다. 그러니까, 절대로……. 넌 너무 여리니까. 내가 널 위해서 밤마다 여호와 주님께 기도를 할 거니까. 주님께서 돌봐주실 거야.’

하지만 내가 전쟁이 끝난 후 투르빌에 갔을 때 할머니는 공동묘지에 계셨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심한 폭격에 충격을 받고 돌아가셨던 거야.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안 때로부터 나는 다시 완전히 무너져 내렸지.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는데. 전쟁은 모든 걸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거지.

공기 중의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서 부유했던 거야. 모든 게 희미했으니까 나는 늘 내가 지금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었지. 그러나 모든 곳이 잠시 동안 머무르기만 하면 충분했지. 어차피 그곳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가 전화라도 걸어볼만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무엇이라도 진지하게 나를 붙잡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나는 가끔 누가 내게 말을 건네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지. 그리고 나서 나는 미련 없이 또 다른 도피처로 떠났던 거야. 항상 수배자가 되어 도망치는 기분이었어. 나는 아프리카 끝까지, 죽음의 해안인 세인트헬레나 만까지 내려갔지. 모르코의 탕헤르에서 거기까지 가는데 십년이 넘게 걸렸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죽지는 못했어.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시아 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 무척 망설이다가 끝내 가질 않았던 거야. 케이프타운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가 출발 직전 결국 내리고 말았지. 싱가포르와 사이공은 매우 가깝거든. 그래서 두려웠던 거야.

그렇지…… 지독한 방랑자처럼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지. 나는 결코 그 어느 곳에도 도달하지 못하였거든. 나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으면서도 아직 진정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고, 모든 장소를 그저 잠깐 스쳐지나가는 어설픈 나그네라는 생각이 들지. 어쨌거나 마지막이 마르세유였어. 그래도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정착했던 것 같아. 몇 년 동안이나. 그 뚜렷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 남쪽에 있는 항구이기 때문일까. 그 방이 편안했기 때문일까. 하여간에 그 방에서는 오랜 불면증에서 벗어나 잠을 잘 수 있었지. 전쟁이 끝난 후 처음으로 맛보는 틀에 박힌 삶 때문일지도 모르지. 틀림없이 나이가 들었지. 늙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파리를 떠나면서부터 계속해서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갔던 거야. 파리를 떠날 때 멀리 더 멀리 남쪽 해안 쪽으로 가고 싶었거든. 남쪽이란 말은 언제나 나에게 감동을 주는 거야.”

그를 알고 나서 일 년쯤이나 이 년쯤, 아니면 삼 년쯤 지났을까. 비가 추적추적 끈질기게 내리는 어느 봄날 초저녁에 이브라함이 그의 방에 갔을 때 자크가 술에 반쯤 취한 채로 무언가 중얼거리다가 불쑥 말하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그 전쟁이 남긴 깊은 고통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는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에 휘말렸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전쟁이 남긴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까?

그때는 그가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상처 받기 쉬운 시기였다. 그는 그 당시 바칼로레아에 합격하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할 때였다. 그는 문학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인쇄소에서 파트타임으로 교정보는 일을 하면서 생라자르 역 근처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문학 모임에 자주 갔었다.

생라자르 역에서 출발한 기차들은 노르망디 쪽 지방행이거나 파리 근교 교외 지역으로 떠났다. 그러나 역 부근의 이 지역은 파리에서 하층민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고 그 모임에는 그 지역 무명의 가난한 시인과 비평가들, 연극이나 독립영화 제작에 관계하는 제작자나 감독들이 모여서 밤늦게까지 독한 럼주를 마시며 자작시를 낭독하고 토론도 하였다. 자크 역시 프랑스 현대문학에 심취해서 매일 같이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도 못할) 시들을 끄적이고 있었고, 가끔 그의 차례가 오면 그 시들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임은 곧 사라졌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나서 1940년 6월 휴전이 되었을 무렵 그 레스토랑은 독일군의 선전부대인 프로파간다 슈타펠에 징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 모였던 사람은 군에 입대하거나 일부는 남쪽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 시절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던 그런대로 무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자크는 그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우아한 모습의 반쯤 잿빛이 도는 금발이었고 러시아식 억양으로 프랑스어를 말했다. 그 해 가을, 플라타너스 나무의 낙엽이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멀리 센 강에서 피어오른 밤안개와 축축한 냉기가 퍼져있는 그 동네의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길을 그녀의 그 길고 섬세한 손가락들이 꼼지락거리는 손을 잡고 걸으며 끊임없이 속삭였고 마침내는 그녀의 아파트 문 앞에서 헤어져야했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 싶다는 미친 듯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가 서부전선으로 떠나는 군용열차에, 지옥행 열차에 올라탔을 때 (그때는 아직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시기, 앉아서 하는 전쟁 혹은 가짜 전쟁의 시기였다.) 출발을 알리는 파리 리용 역 역무원의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리고 그 해 5월, 아르덴 숲 남쪽의 뫼즈 강 전선에서 있었던 마지막 전투. 독일군 장거리 곡사포의 포탄이 작렬할 때의 그 고막을 찢는 듯한 폭발음, 독일의 급강하 폭격기인 융커스 Ju 87이 퍼붓는 230킬로그램짜리 대형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 박격포 소리, 히틀러의 전기톱이라고 불리던 MG42 기관총의 독특한 발사음, 막대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 독일군 팬저 기갑부대의 탱크가 내는 소름끼치는 굉음, 비명, 신음, 고함, 욕설, 분노와 공포의 절규, 기도 소리, 아우성 등이 살아있는 동안 내내 귀에 생생하였던 것이다.

마을은 텅 비어있다. 집들은 폭격으로 거의 부서졌고 마을 사람들은 철수했다. 어른들은 등에 봇짐을 지고 손수레와 유모차에는 갓난애들과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싣고 정처 없이 남쪽으로 떠났다. 보병 연대가 주둔하면서부터 친숙해졌던 숲과 언덕, 작은 강들이 잠시 정적에 휩싸여 평화롭다. 태양이 비스듬히 지고 있다. 어스름한 저녁이 다가온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봄꽃들이 만발해 있고 자작나무들이 우거져있는 들판을 지나간다. 그 바람이 모든 희망과 절망, 부질없는 상상마저 죽은 나뭇잎인 것처럼 모두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간헐적으로 조명탄이 터지며 빛이 펼쳐진다. 철모들이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군인들은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독일 장거리 곡사포는 저 멀리 그 모습을 숨긴 채 집중포화를 퍼붓고, 급강하 폭격기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심심풀이로 아군 진지에 폭탄을 투하한다. 탱크의 굉음이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는 단념했다. 그를 오랫동안 짓눌렀던 무서운 공포심과 불안감은 그 순간 사라졌다. 그는 울지 않는다. ‘곧, 날이 밝자마자 독일 보병 부대가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겠지. 그러면, 부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풍비박산이 되겠지. 공동묘지가 기다리고 있는 거지. 거기가 나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거거든. ― 자크 장프랑수아. 21세. 베트남 빈롱 출신. 29보병연대 소속. 1940년 5월 31일 사망.’

그의 눈은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해 붉게 충혈 되어 있고, 안면 경련이 심하게 일어나고 손등에는 생채기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다. 그는 기진맥진하고 허기가 져 몽롱하다. 그제 저녁부터 꼬박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수통에 물도 거의 바닥이 났다. 모든 게 안개처럼 흐릿할 뿐이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어차피 잉여 인간으로 살아야 했으니. 프랑스는 날 받아 준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이방인 아니면 아시아에서 온 뜨내기 여행자에 불과했다. 인종적 차별을 뚫고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랬으니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있을 리 없었다. 시나 평론, 서평 같은 글을 쓰겠다는 막연한 희망 이외에는.’

그리고, 빈롱에서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가, 등이 굽은 할머니가, 티베트 분지에서부터 꿈길처럼 아득하게 흘러 흘러서 마침내 강의 하구 삼각주에 다다른 메콩 강의 유장한 강물이, 투르빌과 생선 냄새에 찌든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원고들 뭉치가 연거푸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자크는 그때, 격렬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긴장된 순간에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 추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런 거야. 나는 이미 죽은 거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죽일 수 없는 거다. 나는 인간을 향해 총을 쏘지 않을 거고 수류탄도 던지지 않을 거야. 그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그건 엄중하고 치명적인 대죄 mortal sin이니까.

지금은 이 지상에서 최후의 평화스런 순간이지. 마지막 순간이 될 거야. 그런 거지 뭐.’

 

그해 5월의 뫼즈 강 전투 때 부대는 괴멸되었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사실 죽기를 바랐는데 말이다.) 독일 드레스덴 수용소에서 5년간의 혹독한 포로생활을 추억처럼 회상할 수 있을까? (포로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학대, 총살로 죽었는데 말이다.) 그는 1945년 5월 독일의 패망으로 석방된 후, 영양실조로 아래 이가 세 개인가 네 개가 빠져있었고 몸은 막대기처럼 마른 채 자주 심하게 기침을 콜록 거리며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1940년 6월은 악몽의 계절, 잔인한 계절이었지만 1945년 6월은 승리의 계절, 빛나는 계절이었다. 그는 리옹 역에서 기차에서 내릴 때 오랫동안 병석에서 누워 있다가 완쾌되어 퇴원하는 환자처럼 가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되돌아본다. 내가 왜 살아남아있는가? 나는 살육으로 얼룩진 그날의 전투에서 내가 살아남은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신의 가호 혹은 운명의 장난? 나는 그 위대한 유일신에게 전쟁 전에는 너무 두려워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는데, 전선에서는 처음에는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였는데, 그리고 마침내 버렸는데……. 그 참혹한 전쟁의 기억들이 저절로 지워질 수 있을까? 나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마침내 치유하고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적인 삶 속으로 그럭저럭 복귀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지금 안식처 또는 피난처를? 지금 나의 인생행로를 어떻게 예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모든 장면들이 더욱 또렷해졌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살과 뼈가 타는 냄새, 죽음의 악취가 항상 코끝에 맴돌았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그 끔찍한 전투장면들이 꿈속에 나타났다.

부대의 괴멸과 항복.

그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항복 아니면, 그 직전에 탈출만이 차선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때는 사병들에게 가혹했던 가학적인 특무상사가 앞장을 섰고 자신의 안위에 골몰하는 거들먹거리는 몇몇 장교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탈출을 아주 가볍게 여긴 듯하다. 그래서 겨우 살아남은 일부는 뫼즈 강을 따라 남쪽으로 탈출하였지만 나머지는 항복했었다. 종전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때 탈출했던 장교와 병사들 전원은 랑그르 근처 뫼즈 강 지류에서 독일군 수색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는 1940년 6월 휴전협정 조인 직전에 포로로 잡혀있기 때문에) 부대원 100여명과 함께 독일로 강제 이송되었다. 그러나 5년 동안 포로수용소 생활의 쓰라린 경험이 그를 평생 동안 짓눌렀다. 역시 인종차별, 아시아의 원숭이. 가혹한 강제 노동, 배고픔, 수면 부족, 추위, 폭력과 학대, 만행.

그는 종전 후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결혼도 할 수 없었고 변변한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때는 프랑스와 베트남이 한창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반은 베트남 사람이고 나머지 반은 정확히 프랑스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의 방은 3층 남쪽 코너에 있는 작은 방이다. 자기 방. 영혼이 안식을 취하는 방. 어머니의 자궁, 요나가 머물렀던 고래의 배 속, 튀빙겐 탑 속 지하에 있는 휠덜린의 방 같은 어둠침침한 작은 방. 그 방은 수도승의 방과 같다. 그가 알코올 의존증임에도 불구하고 얼룩이나 티클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스스로 정돈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깨끗하였다. 한 쪽 구석에는 항상 깔끔하게 정리 된 일인용 침대, 반대 구석에는 간이 주방이 있고, 원고 뭉치와 무엇인지 깨알같이 쓴 노트, 초고와 최종 원고, 메모, 편지 등이 가득 들어있는 두 개의 나무 상자가 탁자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리고 벽면에 붙은 선반에는 작은 위스키 술병들과 여러 종류의 약병과 함께 주로 문학과 철학에 관한 손때 묻은 수십 권의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래서 그 작은 공간은 너무 비좁았지만 한없이 아늑하였다.

물론 그 책들은 몇 권의 중세 이탈리아어로 된 필사본과 그리스어 책을 빼면 희귀한 판본들이 아니다. 흔하디흔한 보급판 문고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그 책들을 지금 읽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 말했었다. “그 전쟁 이후 더는 한 줄도 책을 읽지 않았어. 단 한 줄도. 난 어차피 외톨이여서 닥치는 대로 읽는 책 벌레였는데 말이지. 그만 독서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지. 그러나 삶의 소금이고 삶의 유일한 빛이었던 것, 손 떼 묻은 것을 그냥 버리지는 못하였지. 나에게는 어떤 종류이든 모든 책은 성서인 거야. 그래서 이 방은 지성소인 거지. 책을 버린다는 것은, 또는 헌책방에 팔아버리는 것은 어쩐지 옳지 않은 일로 여겨졌던 거야.”

하지만 누렇게 바란 흰색 벽면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도 붙어있지도 않았다. 거기에 그가 좋아하는 반 고흐의 복제한 그림 몇 점이나 가족사진, 투르빌의 자연 풍경 사진, 할머니의 초상화 등이 걸려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은 하루 종일 지중해 쪽 먼 바다에서부터 계절풍이 불어왔다. 작은 창문을 통해서 석양의 여린 빛이 여과되어 비스듬히 들어온다. 그러나 검은 구름이 창문에 그늘을 드리우며 구 항구의 바다 쪽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이내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가는 빗줄기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도시의 소음을 잠재우며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이브라함이 말했다.

“그가 만날 날 붙잡고 잔소리를 하였지. 꼭, 우리 아버지처럼……. ‘나처럼 알코올 중독이 되고 싶으면 얼마든지 마셔도 괜찮을 거야’라고 말했지. 절대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밖에 없다고 하였어. 도대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하였어. 그는 한 때 모든 것을 망각하기 위해, 필름이 완전히 끊기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통제 불능의 상태, 완전히 미쳐버리거나 알코올성 발작을 일으켜 차라리 정신병원에 입원키 위해 마구 들이켰지만, 그때마다 도대체 정신이 말짱하였다고 하였어. 그러나 그는 언제부터인가 술을 줄이기 시작했지. 옛날에 비하면 많이 줄이고 절제를 하였던 거야. 하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하였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 술은 일종의 신경안정제였으니깐.

나 역시 생활이 안정돼 가면서 그의 충고에 따라 술을 점차 줄일 수 있었지. 그렇지, 완전히 끊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줄이기는 했지. 그런데 그 놈의 술 때문에 알제 시절에도 형과는 무척이나 말다툼을 했거든. 형은 지독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거야.

하여간에…… 지금까지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어. 나를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깨닫게 해주었고,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지. 그 현자는 나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거야.”

자크는 그때 이브라함이 어려운 책들을 읽을 수 있게 정성껏 도와주었다. 그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쉽게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이브라함은 그 무렵 말라르메, 베를렌, 아폴리네르, 플로베르, 프루스트, 카뮈, 모디아노, 클레지오를 읽었다. 특히 카뮈의 책을 많이 읽었다.

그는 몇 년 동안 무서운 집중력을 가지고 소설을, 시를, 다른 책들을 무더기로 읽었다. 반쯤 밖에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그 당시 프랑스의 정형화된 얼치기 대학생들보다도 더 많이 읽었고, 그들보다 인생 경험이 훨씬 풍부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언제든지 이브라함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든지 기꺼이 들어준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자크와 함께 에스프레소를 또는 가끔 맥주를 마시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브라함은 자크에게 언제든지 기댈 수 있었다. 그가 아버지 역할을 자임하였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어떤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람. 저 세상으로 간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버지.) 그러나 주로 밤 시간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브라함은 낮이면 무슨 일이든지 일을 해야 했으니까.

가끔 그들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다. 그때는 이브라함은 듣는 쪽이었다. 그들은 어떤 날은 토론에 몰입한 나머지 밤을 꼬박 새면서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하여 말했고, 육체의 죽음은 무의미하다고 말했으며, 또한 영혼의 불멸과는 차원이 다른 불교의 윤회와 환생, 수레바퀴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전쟁 전에는,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서 할머니를 따라 먼 거리를 걸어서 천주교 성당을 다녔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예수 그리스도 숭배자이었지만, 투르빌에서도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그의 할머니들은 오직 하나님밖에 몰랐으니까 참으로 진정한 기독교도이었다), 그 지독한 기숙학교 시절에도 한 번도 신을 의심해 본적이 없었지만, 전쟁 중에 그 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그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말이야…… 그 무익한 전쟁은 피와 고함소리 속에서 모든 것을 망가뜨렸지. 인간의 삶, 사랑, 고뇌, 영혼, 죄악까지도 완전히 파괴해 버렸고, 마침내 신의 존재까지…….” 이번에는 스카치위스키 몇 잔을 스트레이트로 들이키고 나서 약간 취했고 목구멍에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 높고 낮은 목소리가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은 탁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는 치밀어 올라오는 가래를 꿀꺽 삼켰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절망의 늪에 빠진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어가 있겠어. 자신이 믿는 신께 애타게 구원을 찾는 거겠지. 나는 히믈러가 ‘나는 모든 유대인들을 지구상에서 멸절 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리고 유대인들이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위대한 신 야훼를 찾았는지, 지금도 궁금하지. 그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러시아계 유대인이었어. 지금 어쩐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는 않고만. 가슴이 먹먹해질 거니까. 그냥 M이라고 하겠어. M은 전쟁 초기 돈을 주고 신분 세탁을 해서 그 당시 유대인 문제 전담 경찰들의 추적을 따돌렸지만…… 1942년 봄에 생라자르 역 대합실에서 그녀를 미행했던 자들에게 잡히고 말았지. 사실은 그 모임의 누가 밀고를 한 거였어. 독일군의 파리 점령 후 친독의용대의 대원이 된 자칭 초현실주의 시인이 말이야. 그 인간은 그 시절 그녀를 보살펴준다는 핑계로 그녀의 아파트를 번질나게 들락거렸고 몇 번씩이나 짓밟고 그것도 모자라서 회유와 협박을 해서 가지고 있던 얼마간의 돈과 금붙이를 갈취하고 나서 그들의 끄나풀에게 불어버렸던 거야. 합스부르크 제국의 귀족 출신 행세를 하였던 허풍쟁이였으니까 무슨 공명심 때문이었을 거야. 그자는 종전 후 체포되기 직전 자살하였지. 하지만 그녀는 유대인 임시 수용소를 걸쳐 결국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어. 나는 그때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다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유대인의 최후 세대가 되는 줄로 알았었지. 내가 파리로 돌아온 후 제일 먼저 그녀를 수소문 하던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거야. 그 후 나는 파리를 떠났고 다시는 파리에 돌아가지 않았지.

그런데, 신의 구원이란 게 인간의 죽음과 관계가 있어. 인간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신의 몫이거든. 그때 우리 쪽도 적들도 같은 신을 믿고 있었으니까 같은 신을 향해 서로 울부짖었어. ‘주님이시여, 여호와여, 저의 영혼을 구하여주소서.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여주소서. 불의 세계를 퍼부어 주세요. 어서 빨리 불을 내리소서. 저들을 죽게 하소서. 몰살시켜 주세요. 저들이 죽어야만 제가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시여, 예수그리스도여 구해주세요. 오, 저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소서.’

그러나, 하나님인들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그때 신은 기가 막혀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 그랬으니 하나님의 목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았어. 그들도 못 들었을 거야. 나는 그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하게 되었지. 미망과 환상에서 깨어난 거였어. 그 후 더 이상 어떠한 형식이든 기도를 하지 않았지. 그랬더니, 오히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어. 이 무의미한 전쟁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삶에 대한 집착이 신에 집착하게 된 동기인 것을 마침내 깨달은 거였어.

지금은 참으로 기적의 시대이거든. 반세기 동안이나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단 말이지,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겠어? 지난 전쟁에서 신이 죽었으니까 이제야 평화가 찾아온 거야. 그러니까 1차 전쟁에서 신은 상당한 내상을 입었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서 죽지는 않았는데 2차 전쟁에서 확실하게 죽은 거지. 2차 전쟁은 신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확인 사살까지 하였던 거야. 그러나 알라신은 지난 전쟁에 참전하지 아니하였으니까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알라신께 구원을 요청할 필요가 있을까? 그 신은 너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이슬람의 천국은 널 기다리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천국이 없었거나 아니면 이미 망가졌겠지. 네 아버지가 그 고난을 겪고 죽으면서 신을 버리지 않았는지 궁금하구나?”

그러고 보니, 새삼스럽게 살펴보았지만 방안에는 그가 성서라고 지칭한 소중한 책들 이외에는 작은 십자가나 성모상 같은 성물, 성경책, 개인적인 토템 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성당이건 교회이건 간에 그런 곳에 다니는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새벽의 여명이 검은 밤의 여운과 함께 작은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밤이 흐트러지고 있다. 새벽 공기가 냉랭하고, 눅진하다. 검고 하얀 포석이 깔린 뒷골목의 눈에 익은 거리 풍경이 밤의 어둠과 정적, 추상적 분위기에서 풀려나면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안도감을 안겨준다. 그 밤은 명철한 예지가 빛나고 추상적 개념과 의미가 충만한 밤이었다.

이브라함이 말했다.

“나는 한동안 자크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야. 아침에 깨어나면서부터 오늘은 꼭 들려야한다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그게 몇 개월이나 되었지. 차츰차츰 내켜하지 않게 된 거지. 나에게는 그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 무렵 다시 술집에 매일처럼 드나들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었거든. 뒷골목 아가씨들을 만나고. 왜 그렇게 술을 마셨겠어? 당신도 알겠지만 술에 취하면 꾹꾹 참았던 말을 할 수 있게 되거든.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나 자신에게만 말했지. 작은 목소리로.

자크가 알코올 중독의 후유증으로 마르세유 시립병원의 행려병자 병동에 입원했을 때서야 문병을 갔었는데 그때는 혼자서 죽어가고 있었지. 그는 날 그저 무덤덤하게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지. 그는 죽음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며칠 동안 내내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던 거야.”

이브라함은 끝까지 임종자리를 지키면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그가 말을 많이 해야 했지만 그때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그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울었다.

자크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죽어가면서 침대에 꼼짝 못하고 누워있으니까 오랫동안 잊혀졌던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거야. 어떤 영적 계시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주었으면 하지.”

 

그는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망각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희미한 기억을 퍼 올렸다. 가장 먼저 열대의 몬순 계절이면 하늘에서 무섭게 쏟아지는 소나기와 강둑을 넘치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생각났다. 그는 가끔 헛소리를 하였다. 그때는 베트남 할머니 집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를 키엠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메아리처럼 여운을 남긴다.

건기의 무덥고 숨 막히는 듯한 열기가 수그러든 석양 무렵이었던가, 어쩌면 해가 막 떠오르는 아침 무렵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양이 그때 거대한 붉은 점처럼 동쪽에서 솟아올랐는지, 서쪽으로 사라졌는지 확실치 않다. 그때 햇살은 빛이 바랜 것처럼 미적지근한 색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날이 집안에서 제삿날 같은 무슨 특별한 날이었는지도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열대 식물이 만발한 널따란 정원의 한쪽 모퉁이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나지막이 소곤거리고 있었다. 할머니가 자신에게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했다. “어쨌거나, 저 애는 프랑스로 보내야 할 거야. 애비가 제 자식을 거부할 수는 없겠지. 똑똑한 아이니까 잘 적응할 수 있을 거야. 무슨 절차를 밟는데 1년쯤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까, 내가 알아서 키엠을 프랑스로 보낼 거야. 너는 그 사람을 따라서 당장 사이공으로 떠나야만 해.”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 말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마 침묵으로 긍정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분명히 울고 있었다. 그가 열대식물의 너른 잎 뒤에 숨어서 가느다란 햇살의 역광선 속에서 보았으니까. 어머니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그 눈물은 이내 뺨을 타고 흘렀다.

 

키엠은 8살 때 베트남을 떠난 후 지금 죽을 때까지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끝도 없이 헤맸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그 영혼은 다시 옛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원히 잠들기 위해서. 그는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강폭이 바다처럼 넓어서 맞은 편 강둑이 안개에 싸여 보이지도 않았던 메콩 강 하류의 유장한 강줄기를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때, 이브라함이 침대 옆에 서있을 때 아버지는 쇠약해서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할 수 있는 한 힘껏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브라함은 무릎을 꿇고서 아버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크 장프랑수아 (또는 판 쾅 키엠)의 영혼은 메콩 강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메콩 강은 알고 있다네 강물은 깊어라 슬픔도 깊어라 강은 시시로 변하네 아침에 푸르던 그것이 저녁이면 핏빛으로 물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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