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일보 기자]터키 정부는 지난 15일 이후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과 군경 등 265명이 숨졌으며 터키 정부는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 등 2,839명을 체포했다. 특히 쿠데타를 제압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세력을 향한 피의 보복을 선언하고 나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6일 대통령궁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국가를 통제하고 있으며 충성스러운 군인과 경찰이 쿠데타 시도를 진압했다"면서 "터키에 반역 행위를 한 그들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피의 숙청’을 예고한 전주곡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만약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터키는 내전으로 빠져들 수 있지만 군의 시도가 ‘6시간의 단막극’으로 그치면서 에르도안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더욱 휘두르게 됐다. 쿠데타를 저지시켜 얻게 된 '국민의 남자'라는 이미지는 덤이다. 터키 동부 지역 시이르의 AKP 지역위원장 후아트 오즈구르 칼라프쿠루는 지난해 트위터에서 "칼리프가 오고 있다, 준비하라"라고 했다. 그의 말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칼리프는 아랍어로는 칼리파(Khalīfah)라고 하며, 본래는 '칼리파트 라술 알라(Khalīfat rasul Allah)'로 그 사전적 의미는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다.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이슬람 교리의 순수성과 간결성을 유지하고, 종교를 수호하며,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터키 군(軍)의 쿠데타 실패이후 터키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는 터키 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와 실패한 배경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터키 군이 쿠데타를 시도한 명분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슬람주의에 대한 반발이자 그의 권력 공고화를 견제하기 위한 민주주의 수호라는 기치였다.

터키 군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이른바 ‘세속주의’를 수호해온 세력이다. 터키공화국은 건국후 이슬람국가 가운데 정-교분리(세속주의)를 국정원칙으로 삼아온 나라였다.

터키의 세속주의는 1923년 건국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군림한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고 1차대전 패전후 연합국에 국토가 찢겨 분할될 위기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가 터키공화국을 설립, 강력한 서구화정책을 펼친다. 칼리프제 폐지, 정-교 분리, 종교의 자유 보장, 남녀평등교육, 일부다처제 폐지, 여성의 선거권, 아랍문자 폐지와 알파벳 사용 등의 정책을 펴고 군은 무스타파 케말 정신 즉 세속주의 정책의 수호자로 나선다.

그러나 이러한 군부의 세속주의 전통은 2003년 이스탄불 시장 출신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나타나 총리가 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스타파 케말 이후 가장 성공한 정치인으로 꼽히는데 이슬람에 뿌리를 둔 현 집권 정의개발당(AKP)를 창당, 세 차례 총선 승리를 거두면서 2003~2014년 총리를 지내고 4연임을 제한한 당규에 막히자 2014년 첫 직선제 대통령이 됐다.

에르도안은 터키를 미국식 대통령제 국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2001년 위기를 겪었던 터키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슬람 가치를 강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이스탄불 교통국에서 일할 때 군 출신 국장으로부터 콧수염을 밀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사직하기도 했다. 터키 공직에서는 헤드 스카프 착용이 오랫동안 금지돼왔지만 아내에게는 이것을 쓰도록 했다.

대통령이 돼선 수도 앙카라에 있는 초호화 대통령궁에 외국 고위 관리들이 방문하면 터키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16인의 전사에 둘러싸여 이들을 맞는다. 과거 오스만제국의 칼리프(과거 이슬람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사절을 맞던 방식이다.무스타파 케말의 세속주의 정신을 수호해온 군은 에르도안의 이슬람 회귀에 불만을 갖고 몇 차례 쿠데타를 시도해왔고, 에르도안은 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왔다.

2007년에는 '에르게네콘'이라는 극우파 네트워크를 조직해 무장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로 전·현직 군 고위간부와 언론인·정치인 등을 대거 잡아들여 수년 간 이어진 재판을 통해 이중 275명이 유죄를 선고받게 해 권력을 굳건히 장악했다. 경찰과 정보기관을 군의 대항 세력으로 키웠다.

지난 2년 동안 에르도안과 군은 타협을 본 것처럼 보였다. 터키 반정부 단체 쿠르드노동자당(PKK)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PKK는 터키 남동부에서 자치권을 획득하기 위해 30년 넘게 무력항쟁을 계속해왔다. 1984년 이후 쿠르드와의 내전으로 수만 명이 사망했고 휴전협정을 맺어 2년 이상 안정이 유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니파 급진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쿠르드에 공격을 가하면서 지난해 7월 협정은 파기됐다. 쿠르드는 터키 정부가 IS를 비호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후 PKK는 터키 군경을 공격했고 터키는 PKK를 반국가 테러단체로 규정한후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

이 와중에 에르도안에 대한 군의 불만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재판에서 동료들이 대거 유죄 판결을 받자 군은 분개했다. 또 다수는 PKK과의 갈등이 낳은 폭력은 정부가 과거에 PKK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탓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시리아 내전을 틈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부상했을 때 정부가 이를 용인했고, 이와 맞물려 IS 격퇴전에서 터키 군인들이 숨지게 된 것은 에르도안 때문이라는 시각도 군 내에 존재한다.

하지만 군의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에르도안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지고 터키의 이슬람주의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언론은 통제되고 있고 사법부는 에르도안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에르도안의 권력 강화에 유일한 견제 세력으로 여겨졌던 군마저 힘을 잃게 되면 에르도안의 힘은 더욱 강해질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 국제사회는 현 정부를 지지했다. 위기상황에서 기꺼이 거리로 달려 나오는 국내 지지자들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자신감은 에르도안 통치의 전제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케말 파샤의 터키 공화국이 술탄 에르도안의 신오토만 제국으로 치달아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들이 조심스레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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