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주 기자] 이세돌 9단은 조훈현, 이창호에 이어 한국바둑의 ‘3대 천왕’으로 불린다.

형인 이상훈 프로를 따라 12세(1995년)에 입단해 국내 두 번째 형제 기사가 됐다. 그는 지난 2000년 32연승이라는 역대 연승 3위 기록을 세우며 '불패소년'으로 불렸다.

그를 두고 '인류 대표',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 '센돌'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제 ‘이세돌 신드롬’으로 나가온 이세돌, 과연 그는 누구인가?

"세돌이 목 뒤에 점 세 개가 있어요. 비금도에서 난 돌 세 개…. 그래서 세돌이래요."

이세돌 9단의 스승인 권갑용 8단은 "이세돌은 바둑을 둘 때 특유의 기운을 내뿜는다. 어릴 때 굉장히 영기가 강한 아이였다"며 이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도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세돌의 아버지 고(故) 이수오씨는 바둑에 조예가 깊었다. 아들의 목 뒤에 삼각형으로 찍혀 있는 점 세 개를 보고 바둑돌이 떠올랐는지 세돌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며 만족해 했다고 한다.

1983년 3월 2일 태어난 섬 소년 이세돌은 5남매 중 막내다. 어렸을때부터 이세돌의 천재성을 알아본 아버지는 큰 아들인 상훈씨와 함께 서울로 바둑공부를 보냈고 12살이었던 1995년에 입단하게 된다.

현재 작은 누나 이세나씨는 월간바둑 편집장이고, 큰 형은 프로기사 이상훈 9단이다. 이세돌과 이상훈 9단은 국내 두 번째 형제 프로기사다.

이세돌은 12세인 1995년 7월 2일 입단했다. 그리고 그해 제7회 동양증권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예선에서 최창원 5단(당시) 꺾고 첫 승을 거뒀다.

1998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는 큰 슬픔을 겪었다. 아버지의 기일은 이세돌의 생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라"라는 아버지의 영원한 가르침은 이세돌이 역경을 극복하고 뚜렷한 개성을 지키는 원동력이 됐다.

이세돌은 정규 승단대회를 통해 16살이던 1999년 3단으로 승단했다.

그러나 대국료도 없이 별도로 연간 10판씩 소화해야 하는 승단대회는 '실력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판단, 그 이후로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뚝심을 보였다.

그는 3단으로서 2000년 제5기 박카스배 천원전에서 생애 첫 우승컵을, 2002년 제15회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대회에서 생애 첫 세계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세돌은 데뷔 5년만인 2000년에 32연승을 거두며 '불패소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3년 LG배에서는 이창호 9단을 누르면서 바둑 최강자의 계보를 이어받는다. 당시 이세돌에게 패배한 이창호는 그 충격으로 생전 안하던 술을 마셨다고.

뛰어난 실력에도 고집스럽게 3단에 머무는 그를 보고 바둑계는 "반항아"라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용감한 신세대"라고 응원하기도 했다.

결국 보수적인 한국기원이 움직였다. 2003년 1월 이른바 '이세돌 특별법'이라는 제도개혁에 나선 것이다. 일반기전을 승단대회로 대체하고 주요대회 우승시 승단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그 직후부터 이세돌은 날개 돋친 듯 상승세를 탔다. 2003년 3월, 그는 LG배 세계기왕전에서 1인자 이창호 9단을 꺾고 우승하며 세대교체를 선언했다. 3단도 6단으로 뛰어올랐다.

같은 해 5월 KT배 준우승으로 7단이 된 이세돌은 7월 제16기 후지쓰배 2년 연속 우승에 성공하며 가장 높은 9단으로 승단했다.

스무살의 나이로 입단 8년만에 '입신'(入神) 경지인 9단에 오른 것은 한국기원 최단 기록이다.

이때부터 '이세돌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등 흔히 '이세돌 어록'으로 회자되는 말도 이렇게 승승장구한 시기에 나왔다.

이세돌은 2007년∼2008년 연속 상금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파문을 일으켰다.

2009년 5월 프로기사회가 한국바둑리그 불참을 선언한 자신에게 징계를 결의하자 7월 한국기원에 '휴직계'를 제출한 것이다. 1인자가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잠적하자 바둑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전에도 이세돌의 강한 개성에 종종 마찰을 빚던 한국 바둑계는 이세돌이 한국리그에 불참하고 중국리그에는 출전하겠다고 하자 징계 결의를 내렸고, 이세돌은 이에 반발해 휴직이라는 강수로 맞섰다.

한국기원과 대화해 2010년 1월 복귀를 결정한 이세돌은 이후 24연승을 거두며 다시 상승세에 올랐고,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그는 조금씩 후배들의 위협을 받으며 2016년을 맞이했다. 국내 랭킹 1위는 박정환 9단에게 내준 지 오래고, 세계대회에서는 중국의 신성 커제 9단에게 연달아 패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그런 그에게 최대의 도전이 찾아왔다.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의 도전이다.

지난 9일 시작한 대국에서 예상과 달리 그가 3연패에 빠지자 세상은 '인공지능의 습격'이라며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제4국에서 알파고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며 '인간 승리' 감동을 주고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섰다.

이세돌은 알파고와 '세기의 대국'을 앞두고도 가족을 챙기는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아내와 초등학생인 딸은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번 알파고와의 대결을 위해 귀국해 호텔에 머물고 있다.

알파고 대국 직전인 6일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벌써 결혼 10주년"이라며 면세점에서 동갑내기 아내 김현진씨를 위한 화장품을 잔뜩 사고, 캐나다에서 공부하던 딸 혜림양과 다시 만난다며 '딸바보'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다.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