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부터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되면서, 많은 고위 각료들이 청문회장에서 자신의 과거가 벌거벗겨진다. 그런데 청문회를 깨끗하게 통과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대부분 크고 작은 흠으로 곤욕을 치룬다.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고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서도 어김없이 많은 각료 후보자들이 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렀고, 결국 안경환 법무부장관 후보자, 조대엽 고용노동부장관 후보자,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는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사퇴하였다. 아마 임명된 장관들 중에도 청문회에서 발가벗겨진 자신의 민낯에 마음이 편치
눈을 자기 발밑으로 깔면 주위 한 평 정도 땅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더 눈을 들면 자기가 사는 마을이 보이고, 좀 더 들면 자기가 사는 도시가 시야에 들어오고, 그러다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온 우주가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이렇게 우리 머리 위로는 137억 광년이나 되는 아득한 저편까지 펼쳐진, 지금도 계속하여 팽창하고 있는 우주가 있다.그런데 우리는 우리 머리 위에 그렇게 광활한 우주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오직 눈앞에 펼쳐지는 작은 세상사에만 눈을 번뜩이며 탐욕에 눈이 어두워 남을 해치고, 배반하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 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장자 외편 산목(山木)에 나오는 이야기이다(신영복 선생의 번역 인용). 이 이야기는 그 다음에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어느 날 천사를 한쪽 상인에게 보내셨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천사는 이런 제안을 하였다.“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대가 금화 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
최인의 소설 ‘상도(商道)’에서 주인공 임상옥이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 구절이다.임상옥은 이 문장을 자신이 사용하던 계영배(戒盈杯) 밑바닥에 새겨두고 늘 이를 바라보며 자신이 교만해지고 과욕을 부리는 것을 경계하였다. ‘상도’는 조선 시대 중국과의 인삼 교역으로 큰 돈을 번 의주 거상(巨商) 임상옥(1779~1855)을 모델로 한 소설로 위 문장은 실제 인물인 임상옥의 문집 ‘가포집’에 나온다고 한다.‘상도’를 읽으면서 조선 시대에 이런 훌륭한 상인이 있었나 하며 다시 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좌우명인 이 문장에도 마음이 갔다. 재상
얼마전 대한변협에서 신정근 성균관대 철학교수를 초청하여 장자 강의를 열었다.강의 제목은 ‘거꾸로 사는 삶에서 놓여나기’다. 거꾸로 사는 삶에서 놓여나기라…. 거꾸로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장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喪己於物, 失性於俗者, 謂之倒置之民.(상기어물, 실성어속자, 위지도치지민)’ 신교수는 이 구절을 설명하길, ‘외물에 가리어져 자신을 잃고 속세에 빠져 본성을 잃은 사람, 이들을 전도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한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거꾸로 사는 삶에서 놓여나기’란 이런 전도된 삶, 즉 거꾸로 사는 삶에
공자는 인생 50에 하늘의 명을 알게 되고(知天命), 인생 60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고(耳順), 70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從心所慾不逾矩). 사람은 나이가 먹어갈수록 인생의 깊이가 더하여지고 생각의 폭이 넓어져, 인생의 선배로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그렇기에 유교에서는 이러한 노인들을 공경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런데 살다보면, 특히 법조인으로서 사람들의 분쟁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인생의 선배
국회에서 고위 공직자 청문회를 할 때에 그 고위 공직자의 떳떳하지 못한 재산이나 행태가 드러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그런데 이를 보는 시민들의 눈에는 대충 그 재산 형성 경위나 행동의 모습이 어떠했겠다는 것이 읽혀지는데, 정작 당사자 본인은 어설픈 변명으로 일관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또한 정치인이 뒤로 검은 돈을 챙기거나, 선거 과정에서 매수용 돈을 뿌려 수사를 받는 경우에도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펄펄 뛰면서 나아가 오히려 자기를 고소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무고로 고소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수사가 더욱 더 자신을 옥죄어오면 마
“신념이 있는 사람은 왠지 모르게 위대해 보이지만,그 사람은 자신의 과거 의견을 계속 가지고 있을 뿐그 시점부터 정신 또한 멈춰 버린 사람에 불과하다.결국 정신의 태만이 신념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아무리 옳은 듯 보이는 의견이나 주장도끊임없이 신진대사를 반복하고,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고를 수정하여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어느 음식점 화장실 벽에 걸려있던 경구(警句)이다. 내용이 마음이 와 닿아 베껴왔다.니체가 한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신념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고, 그렇게 신념이 있는 사람이면 인생살이에 있어 뭔가 달라
전국 어디를 가나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도시는 물론 농촌을 지나면서도 아파트를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아파트란 세월이 지나갈수록 내구성이 떨어지며 재건축이 거론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부터 아파트가 들어섰기에 재건축 아파트가 이미 들어선 곳도 많고, 지금도 전국 어디선가에는 아파트를 재건축 중이거나 조합이나 재건축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재건축을 논의하는 곳이 많다.특히 우리나라는 아파트 본래의 내구연한에 따른 재건축뿐만 아니라, 재건축을 통한 개발이익을 얻기 위
버나드 쇼가 어느 만찬 석상에서 데생 하나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쇼는 로댕의 작품이라며 데생이 – 아마 조각하려는 대상인듯 – 멋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쇼의 물음에 처음에 조용하다가 하나, 둘 비평의 소리를 쏟아낸다.‘구도가 왜 그 모양이냐’, ‘그것도 데생이라고 한 것이냐’ 등등. 사람들의 혹독한 비평이 끝나 갈 무렵 버나드 쇼는 갑자기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아! 실수를 하였네요. 로댕의 것을 갖고 나온다는 것이 미켈란젤로의 것을 잘못 갖고 나왔네요.’ 그러자 그렇게 혹독한 비평을 하
재판을 하다보면 사소한 것에도 끙끙 앓는 사람을 보게 된다.이런 사람은 재판장이 큰 의미 없이 내뱉은 한마디에도 당장 재판이 어떻게 되는 것 아니냐며 안절부절못한다. 그래서 별 것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해주어도 좀처럼 걱정을 내려놓지 못한다.물론 보통 사람이 송사에 휩싸인다는 그 자체가 큰 고통이요 근심거리이긴 하지만, 어차피 근심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라면 사소한 것은 놓아버리고 일상의 삶을 계속해야 할 것 아닌가?샤르마 박사는 사업가들이 갖고 있는 근심의 세계를 분석해보니 그 중 54%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
공자는 인생 50에 하늘의 명을 알게 되고(知天命), 인생 60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고(耳順), 70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했다(從心所慾不逾矩).사람은 나이가 먹어갈수록 인생의 깊이가 더하여지고 생각의 폭이 넓어져, 인생의 선배로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그렇기에 유교에서는 이러한 노인들을 공경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런데 살다보면, 특히 법조인으로서 사람들의 분쟁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인생의 선배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슈마허(E. F. Schumacher)가 쓴 책 제목이다. 무얼 말하는 것일까?산업혁명 후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경제는 계속 성장해왔다. 그리고 이렇게 경제가 성장, 발전하면서 기술은 점점 복잡해지고 공장은 점점 더 거대해지며, 지금은 개별 국가를 넘어서 전 세계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자본주의는 점점 더 공룡화하고 있다.그런데 경제는 무한정 성장할 수 있는 것인가?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욕망을 먹고 자라왔다. 그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비할 바 없는
변호사란 숙명적으로 남의 분쟁 속에 들어가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다보니 주위에서 화를 내는 사람, 화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화 때문에 파멸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예전에 법원에 있을 때 담당했던 한 형사사건이 기억난다.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화가 나니, 석유통을 들고 와 아내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는 라이터를 손에 들고 불을 붙이겠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는 이에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불을 붙일 테면 붙여보라며 대든다. 남편은 겁만 주려고 라이터를 켰으나 그만 아내 몸에 불이 붙어버렸다.순식간에 아내는 불길에 싸이고,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 서구의 근대 합리주의적 세계관은 정신과 물질을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뉴턴으로 대변되는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로 우주를 아무런 정신이 끼어들지 않는 정교한 기계장치로 보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연결된다.이러한 이원론에서는 단순한 기계 장치에 불과한 자연은 인간이 언제든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객체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그렇기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연에서 좀 더 많은 이익을 캐내고자 자연을 착취하고, 그 결과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 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장자 외편 산목(山木)에 나오는 이야기이다(신영복 선생의 번역 인용). 이 이야기는 그 다음에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남태평양 티아베아 섬마을 추장 투이아비의 연설문을 모아놓았다는 ‘빠빠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투이아비가 유럽에 갔을 때 사람들은 걸어 다니면서 거의 모두가 땅만 쳐다보고, 조금이라도 빨리 걷기 위해 두 팔을 힘차게 내젓더란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잠시 멈춰 세우기라도 하면, 그들은 짜증을 내며 소리치더란다. “왜 저를 방해하시는 겁니까? 저는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현대인들은 바쁘다. 어느 개그 프로의 유행어처럼 바빠도 너~무 바쁘다. 바쁠 뿐만 아니라 바빠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빠야 인생을 보람 있게 사는
평상시 보광동 강변 언덕에 자리 잡은 아파트 11층의 아버님 댁 베란다에서 바라다보면 관악산이 아무런 시야 장애 없이 거침없이 눈앞으로 달려든다. 관악산(冠岳山)은 머리에 갓(冠)을 쓰고 어깨를 파도처럼 출렁이면서 흘러내리며 떡 벌어진 모습을 자랑하고, 그 오른쪽으로 동생 삼성산이 형님의 위용에 눌린 듯 하면서도 삼성산 주봉에서 깃대봉, 장군봉, 호암산의 봉우리들로 북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다.그러다가 호암산은 서울을 향해 급히 달려들 듯한 자세로 급히 멈추었는지 산은 급한 비탈을 이루면서 멈춰 선다. 옛사람들은 이런 모습